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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강좌/칼럼

TRPG를 하려면 룰북을 꼭 써야 하나요?

by 애스디


TRPG를 시작하려는 분들 중에 "TRPG를 하려면 꼭 룰을 익혀야 하나요? 그냥 룰 없이 즉흥적으로 진행하며 놀면 안되나요?" 라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 TRPG를 하려면 룰이 꼭 있어야 합니다."




* TRPG 룰의 기본 역할: 플레이를 위한 소통의 토대.


TRPG는 여러 참가자들이 이야기 속 역할을 나눠 맡고 같은 상상을 공유하며 진행시켜가는 놀이입니다. 룰은 이렇게 이야기 속 역할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정하고, 참가자들이 상상 속의 인물과 세계를 공유하기 위한 토대가 됩니다. 룰이 없다면, 모두가 제각각 그리는 상상을 어떻게 일치시킬 지, 이를 다른 참가자와 어떻게 조율하며 진행할지 틀을 갖출 수 없습니다.


가능성이 과다하면 플레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슨 이야기가 벌어질 수 있겠습니까? 설정과 룰은 무한한 가능성을 다루기 쉬운 수준으로 축약해 줍니다. 그 결과 플레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엄청나게 제한되고, 역설적이지만 자원이 제한되기 때문에 비로소 플레이는 가능하게 됩니다.


- [룰의 역할: 무한정한 자원의 희소화] (by 김성일)


TRPG 플레이를 밴드 합주에 빗대어볼 수 있습니다 ([RPG는 밴드 활동이다] 참조). TRPG는 각자 악기 대신에 캐릭터를 맡고 노래가 아니라 이야기를 함께 진행해가는 것이죠. 룰 없이 TRPG를 한다는 것은, 마치 아무 악보도 코드도 구조도 없이 그냥 무작정 합주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불협화음이 나오고 갈피를 못 잡게 되기 마련이죠.


TRPG에서는 룰을 통해 각 캐릭터가 어떤 인물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확정짓게 됩니다 (캐릭터 제작 규칙). 그리고 이 캐릭터들이 어떤 세상에서 활동하는지 (배경세계), PC들이 그 세상에서 벌이는 행동과 그 결과가 어떻게 처리될 지가 뚜렷해지고요 (판정 룰). 이런 든든한 토대가 있기 때문에 TRPG에서 함께 소통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게 가능한 것입니다. 





* 룰의 역할 (2): 플레이 내용과 방향성을 한정짓는다.


어떤 플레이를 할 지는, 플레이에 쓸 룰북을 선택하는 데서부터 정해집니다. 특정 장르/세계에 맞춰진 시스템(이쪽이 대다수지요)일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던전월드]라면, 환상적인 세계에서 전사, 마법사, 성직자, 도적 같은 영웅들이 함께 괴물과 싸우고 세상을 구하는 모험담을 한다는 게 플레이의 전제입니다. 룰을 고르는 것만으로, 어떤 세상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지 윤곽이 훨씬 뚜렷하게 잡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스템을 정하는 것이 플레이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페이트 코어]나 [GURPS], [새비지월드] 같은 범용룰도 마찬가지입니다. 배경과 장르에 따라 PC 제작 옵션과 지침을 정하면서, 플레이 속 세상과 인물을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들 시스템마다도 고유의 색깔이 있어, 어떤 룰을 쓰느냐에 따라 플레이의 양상이 많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페이트 코어] 같으면 주인공이 능동적이고 유능하고 극적인 이야기를 추구하지요. 주관식의 면모로 인물과 세상을 표현하기 때문에 참가자들의 창의적인 발상을 즉석에서 반영하기 좋은 면이 있고요.




* 룰의 역할 (3): 플레이 방식을 규정한다.


룰은 플레이 속 상상을 공유하고 구현하는 토대일 뿐만 아니라, 플레이 속에서 각 참가자들의 역할과 권한을 조율하는 체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각각 하나의 주인공을 맡고 마스터가 나머지 세상 모두를 담당한다...는 것 자체가 많은 TRPG 시스템에 내재된 룰 중 하나입니다. [페이트 코어]에서 "역발현"과 "세부사항의 선언"(운명점 사용)처럼 이런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경계를 완화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피아스코]는 아예 마스터/플레이어의 구분 없이 모두가 작가 시점에서 장면을 만들어가게 되어 있고요.


이렇게 룰은 참가자들이 플레이 속에서 권한을 나눠갖고 플레이에 참여하는 방식 자체를 규정합니다. 이것은 플레이가 어떤 식으로 운영될 지를 규정하는 좀더 근본적인 룰의 기능이라 볼 수 있습니다. [폴라리스], [피아스코], [아포칼립스 월드] 등 인디 RPG들은 이런 RPG의 플레이 양식 자체를 바꿔보는 실험과 시도의 산물입니다.




맺음말


이제 우리나라에도 한국어로 출간된 시스템이 꽤 많습니다. [GURPS], [Dawn of FATE], [던전월드], [페이트 코어], [새비지 월드], [폴라리스], [아포칼립스 월드], [피아스코]가 정식 출간됐고, 앞으로도 출간 예정인 룰이 적지 않지요. 


위에 얘기한 대로, 어떤 시스템을 고르느냐가 어떤 플레이를 할 것인지를 크게 좌우합니다. 당장은 팀에서 하는 시스템을 따라가며 차근차근 배워만 가도 좋습니다 (RPG 첫걸음 시리즈 '팀 구하기''룰북 고르기' 참조). 어쨌든 TRPG에서 룰이 어떻게 쓰이는지 꼭 체험해보세요. 


그리고 가능하면 다양한 시스템을 접해보세요. 근래에 다양한 룰이 나오면서 TRPG의 가능성은 날로 확장되고 있거든요. 지금 나오는 RPG 시스템들은 지난 40년간 TRPG의 발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과언이 아닙니다. 정말 좋은 시스템들이 많아요.



p.s. 나는 [던전월드][기동형 페이트] 같은 룰도 못 쓰겠다... 할 정도로 간단한 룰을 찾으신다면 몇 가지 대안이 있습니다. 로키님이 소개한 [라이서스], [우슈], [과거의 그늘], [트롤베이브]처럼 굉장히 가벼운 룰이 있습니다. 제가 번역했던 [레이디 블랙버드] 같은 경우도 룰의 골격이 간단해서, 원한다면 자기 설정에 맞춰서 고쳐쓸 수도 있고요. 아예 즉석 RPG 전용 규칙 [인스턴트 게임]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려는 게 그저 즉흥극/만담이 아니라 TRPG 플레이라면 꼭 룰을 사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