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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연구실

RPG의 본질 = 참여형 구비문학 놀이


TRPG의 본질은 "대화를 통해 인물을 움직이며 이야기를 진행한다"입니다. 플레이에서 전투가 한 번도 안 나올 수도 있고, 주사위 굴림이 한 번도 없는 것도 가능하지만 (정식 룰을 쓰는 경우에도요), 대화와 이야기가 없는 플레이는 없습니다. TRPG는 언어에 기반한 이야기 매체이자 유희인 것이지요.


TRPG를 게임이나 즉흥극(소꿉놀이)에 비추어 분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TRPG의 문학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TRPG를 민담, 괴담과 같은 '구비문학' 장르로 이해해보는 게 어떨까 싶어요. 제가 문학도는 아닌지라, 아래 내용은 저의 제한된 이해에 바탕한 썰임을 밝혀둡니다. 




1. 구비문학으로서의 현장성


TRPG 플레이의 큰 특징은 플레이에 같이 참여한 사람만이 느끼고 공감하는 부분이 크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플레이라도 기록(리플레이)으로 옮겨 놓으면 그 재미와 감동이 크게 줄어버려요. 심지어 텍스트 기반의 온라인 플레이도 기록을 보는 것과 직접 플레이를 참가하는 것의 감흥은 천지 차이입니다. 


실시간으로 대화를 하며 분위기를 타고 몰입하는 것, 그리고 목소리, 표정, 동작으로 전달되는 참가자들의 반응이 어우러져 TRPG 고유의 현장성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흥은 구비문학이나 다른 공연과도 통하는 면이 있고요. 한 예로, 연극이 영화에 비해 큰 제약을 가짐에도 갖는 매력은 이런 현장성과 공감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2. 참여와 피드백이 극대화된 매체로서의 TRPG


민담을 얘기할 때 보면, 자연스레 청중이 "그 다음은 설마 이렇게?..." 나 "OO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에요?" 라며 반응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재주 있는 이야기꾼은 그런 반응을 포착해 즉석에서 이야기를 변주하기도 하고요. 이런 식의 소통과 애드립은 TRPG에서도 흔히 있고, 훌륭한 마스터의 비법이지요. 


TRPG는 청중의 반응과 참여를 통해 현장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더욱 최적화된 매체(플랫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여형 구비문학 놀이인 셈이죠. 이를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1) 플레이 중에 대화가 자유롭고 활발해야 합니다. 2) 이야기가 고착되지 않고 유연하게 펼쳐갈 여지가 있어야 합니다. 요즘의 서사형 RPG, 특히 던전월드 등 AWE 시스템은 이렇게 현장에서 이야기를 변주하는데 최적화된 시스템이지요. 반면 D&D처럼 사전에 인카운터나 던전/전투맵 준비가 필요한 시스템은 좀더 까다롭고요. 



3. TRPG만의 특징: 인물을 매개로 이야기를 만든다.


구비문학은 현장에서 청중의 반응을 토대로 변주된다는 점에서 TRPG와 닮았지만, TRPG 플레이어는 단순히 감상자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야기 속 '인물'이자 작가로서 적극 참여하지요. 


TRPG만의 가장 고유한 특징은, 각자 자기 인물을 갖고 움직이면서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점입니다. 스토리를 공동 창작하는 방법에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단연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이라 생각해요. 서술권을 나누는 데 있어, 1) 플레이어는 자기 캐릭터를 움직인다. 2) 마스터는 남은 세계 전반을 맡아 움직인다. 3) 캐릭터 vs. 세상의 상호작용은 룰을 참고해 처리한다. 는 체계가 문학 창작매체로서 TRPG의 혁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캐릭터 서술을 늘 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도적으로 맡은 이가 있기에 서로의 서술과 반응이 얽혀서 역동적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춤을 추든 싸움을 하든 상대가 있어야 하듯이 말이죠. 대개는 플레이어 vs. 마스터가 일차적인 갈등 상대가 되지만, 플레이어 vs. 플레이어 간의 갈등은 잘 나오면 훨씬 더 흥미롭지요. 


TRPG 플레이에서 캐릭터 간의 대화 장면이 특히 재미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인물 시점으로 직접 대화를 나누니 1인칭 시점의 몰입감이 극대화되거든요. 밀도 높은 대화 장면은, 대화 롤플레이 그 자체만으로 맺는 게 제일 짜릿하더라고요. 필요에 따라 룰도 쓰지만, 판정이 개입되는 순간 분위기가 깨지는 감이 있습니다. (이 얘긴 언제 따로 해보고 싶네요)


즉, TRPG는 "인물을 매개로 서술권을 나눠 같이 이야기를 만들며 즐기는 구비문학 놀이"라고 정의하겠습니다. TRPG 룰은 비록 워게임에서 태동했지만 그 자체가 게임을 위한 룰이라기보다 서술권을 나누고 이야기를 창출하기 위한 툴(tool)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고 봐요.



4. 어떤 플레이를 추구할 것인가?: 영화 vs. 마당극


마스터와 시나리오의 비중을 어느 정도로 둘 것인가가 TRPG 플레이의 성격을 크게 좌우하는 변수라고 봅니다. 고전적인 마스터 중심 시나리오 위주 진행도 나름의 강점이 있습니다. 정교한 플롯과 연출, 전투 인카운터, 지도와 미니어처를 준비해 몰입감을 더할 수 있으니까요. 많은 예산을 들인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말이죠. 대신 사전 준비에 공을 들일수록, 현장에서 참가자의 선택이나 반응을 반영해 이를 '뒤집어 엎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반대로 무대를 비우는 대신 현장의 소통과 가능성에 기대는 방향도 있습니다. 마스터의 사전 준비를 최소화하고, 현장에서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에 공감하는지에 따라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지요. 볼품 없이 대충 그린 지도 위에 상상력만 덧칠하더라도요. 화려한 무대와 소품 다 걷어치우고 순수히 참가자의 대화와 동작에 집중하는 마당극 같은 식이랄까요?


현장 중심의 서사식 플레이가 어려운 혹은 두려운 이유는, 이것이 팀원 전체의 호흡과 하모니에 크게 기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마스터 한 사람이 준비해 온 스토리 위주로 척척 펼치는 쪽이 훨씬 수월하거든요. 소설, 만화, 영화, 게임 등 기존 스토리 매체도 모두 이렇게 창작자->수용자가 분리된 식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TRPG가 비록 워게임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참여형 구비문학 놀이'로 발달해왔고 거기에 TRPG만의 강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이런 서사 지향 TRPG 룰도 많이 나왔으니, 취향에 맞는 대로 다양하게 시도해보시면 좋겠다 싶습니다. 참가자 모두가 공감하는 장르나 참고작품이 있다면 함께 합을 맞춰가는 발판으로 삼기 좋을테고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시면 좋겠고요. "TRPG는 참여형 구비문학 놀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다른 의견이나 코멘트도 환영입니다. 늘 즐거운 RPG 하시길!



@ 같이 보시면 좋은 글 추천.


- TRPG 플레이 진행의 3가지 방식: http://rpgist.tistory.com/98

- 마스터링의 기본 원리: http://rpgist.tistory.com/63

- 흐름을 타는 마스터링: http://rpgist.tistory.com/39

- 마스터처럼 플레이 참여하기: http://rpgist.tistory.com/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