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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링 강좌

TRPG 플레이 진행의 3가지 방식.


이 글에선 제가 TRPG를 하면서, 플레이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얘기해보려 합니다. "게임 시나리오"식의 고전적 방식, 열린 전개를 중시하는 "피드백 마스터링", 그리고 사전설정을 최소화하는 "합의에 의한 플레이"의 3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보려 해요.



1. 고전적인 TRPG 시나리오 작법: "게임" 만들기.


제가 처음 TRPG를 접하고 마스터링을 하던 시절엔, 시나리오를 짤 때 일종의 "컴퓨터 게임을 만든다"는 감각으로 임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게임으로 만들면 좋을만한 구상을 노트에 잔뜩 써두기도 했었거든요. RPG 쯔꾸르 같은 툴로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에 비해 TRPG는 그래픽/사운드 작업 부담 없이 스토리랑 전투 데이터만 갖추면 되니, 게임 제작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훨씬 간편한 도구였습니다. 


이렇게 "게임 제작자"의 관점에서 플레이를 준비한다면, 기본적으로 자기가 구상한 재미있는 스토리를 게임 시나리오로 구현하고 그걸 플레이어에게 펼쳐내는 식이 됩니다. 자기 팀원만을 위한 인디 게임을 만드는 거라고 볼 수 있겠지요. 지금도 D&D를 위시한 고전적인 RPG 시나리오 작법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플레이어들이 감정이입할만한 스토리라인을 짜고 적절한 난이도의 전투 씬을 넣는 거죠. 거기에 얼마간의 선택지(시나리오 분기점)나 다른 미니 게임 요소를 더할 수도 있고요. 


D&D 시나리오의 기본인 "던전"의 경우, 컴퓨터 게임 식으로 돌리기 딱 좋은 방식이죠. 마스터가 미리 맵을 다 짜고 그 안에서 PC들이 이동하면서 준비된 이벤트를 겪는 거니까요. 던전을 벗어나지 않는 한, PC들이 마스터의 예상범위 내를 벗어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이런 고전적인 마스터링 방식은 준비하고 돌리기 쉽습니다. 대신 마스터 = 게임을 준비하는 사람 / 플레이어 = 준비된 게임을 하는 사람으로 나뉘어, 플레이어의 역할이 수동적으로 제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PC들이 마스터의 구상 안에서 움직일 때, 준비된 인카운터와 기믹을 100%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한편 이렇게 마스터가 준비한 범위 안에서 노는 플레이를 한다면, 컴퓨터 게임이 아니라 TRPG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게임 디자이너의 구상 안에서 준비된 컨텐츠를 즐기는 거라면, 그냥 잘 만들어진 게임을 해도 충분한 것 아닐까요? 그저 좀더 아날로그한 방식으로, 게임제작사 대신에 마스터가 만든 컨텐츠를 즐기는 것은 아닐른지요?



2. 예상을 벗어나는 선택과 "피드백 마스터링".


TRPG가 컴퓨터 게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 중 하나는, PC가 마스터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내 시나리오는 PC가 가능한한 예상범위 안에서 행동할 때, 제일 재미있다."라는 마스터라면 되도록 이런 상황은 피하고 싶겠지만요. 일단 준비된 자료를 쓸 수 없는 상황이니 당장은 곤란에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상을 벗어난 행동으로 색다른 전개가 나왔을 때야말로, TRPG만이 갖는 재미가 빛나는 순간이고, 더불어 플레이어가 이야기 전개에 역동적으로 개입하는 지점입니다. 마스터로서도 신선한 충격과 재미를 느낄 수 있고요. ("여기서 이런 전개가 나올 줄이야...") 


그래서 제 경우는 마스터가 준비한 줄거리와 연출을 멋지게 펼쳐내는 것보다, 상황만 던져놓고 플레이어들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알아보는 쪽으로 점점 마스터링 스타일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PC들에게 위기와 갈등을 내놓되 그 해결법과 이후 전개는 정해두지 않고 열어놓는 것이죠. 위시송님의 [피드백 마스터링] 방식이나 제가 겪은 [흐름을 타는 마스터링]이 이와 상통합니다.


이러한 "피드백 마스터링" 방식에서도 마스터가 준비하는 사전 설정은 있습니다. [포도원의 파수견]의 마을 설정이나 [던전월드]의 국면처럼요. 하지만 "무대"는 준비하되 "스토리"는 정해두지 않는다는 점이 큰 차이입니다. PC가 행동해야할 갈등 상황을 내놓고, 그 행동에 따른 역동적인 전개를 낳기 위한 설정인 것이지요. TRPG에서만 가능한 즉석의 열린 전개에 맞춰진 형태로 시나리오를 준비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3. 서술권과 정보 격차를 무너뜨리기: "합의에 의한 플레이".


앞서 설명한 피드백 마스터링은 PC가 실제 장면에서 택할 행동을 일일히 예상해두지 않습니다. 따라서 즉석에서 나온 전개를 유연히 활용하는 애드립이 요구됩니다. 플레이 중에 나온 아이디어를 적극 반영하는 플레이라면, 이를 굳이 PC의 행동에 한정할 필요 없이 배경 설정 및 진행에도 폭넓게 허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던전월드]의 경우, 플레이어에게 묻고 그 답을 활용한다는 기법이 있지요.


한편, 마스터와의 정보 격차 때문에 플레이어가 헤매거나 진행상 곤란한 선택을 하는 일도 있습니다. 추리물 등 마스터가 내막을 숨겨둔 플레이에서 종종 생기는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는 마스터가 준비한 사전 설정을 뒤집어 엎는 것입니다. [던전월드] 같이 플롯을 정해두지 않고 플레이 중 즉석에서 나오는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는 플레이에서 특히 유용합니다. 


이렇듯 사전 설정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면, 더 나아가 사전 설정을 최소화하고 즉석에서 참가자 모두가 내놓는 아이디어를 이용해 플레이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마스터가 대놓고 "내가 미리 정해놓은 건 없으니 자유롭게 의견 내도 돼요."라고 하는 거지요. [던전월드]의 캐릭터 제작+첫 세션이 이런 쪽에 가깝고요. [고마워요! 대소동 해결단] 역시 비슷하게 모두가 배경 설정에 참여하며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쪽이라 봐요. 아예 마스터를 없앤 [피아스코]나 [폴라리스], [평온한 한 해] 같은 시스템의 예도 있고요. 


Session에서 주로 "합의에 의한 플레이"란 용어로 언급되다 보니, 참가자들이 일어날 일을 모두 합의로 정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나 라는 우려가 있는데요. 사실 그보다 플레이 중에 따로 숨겨둔 설정 없이, 누구든지 설정과 진행에 대해 의견을 내고 모두가 동감하면 반영되는 플레이에 가깝다고 봅니다. 플레이에 나오는 설정이나 전개가 마스터의 뒷설정/자의적 판단에 의한 게 아니라, 모두가 공감한 제안에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4. 어떤 진행 방식을 취할 것인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하긴 했지만, 이 세 가지를 엄격히 나누기보다 중간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피드백 마스터링" 방식은 마스터가 시나리오를 어떻게 준비하나에선 고전적 방식과 차이가 있지만, 플레이어 입장에선 큰 차이를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정해진 플롯이 없으니 PC가 좀더 마음 놓고 행동할 수 있고, 그 선택이 유연하게 반영될 수 있다는 정도의 차이지요. 한편, "피드백 마스터링"에서 "합의에 의한 플레이"로의 이행은, 참가자 모두가 단순히 PC만 조종하는 것을 넘어 플레이 전반에 활발히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활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각각의 진행 방식은 고유한 장단점을 가지고 있고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개별 시스템의 특성에 따라서도 적합한 플레이 방식이 다를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시노비가미] 같은 시스템은 시나리오 내막은 철저히 마스터가 준비하지만, 실제 플레이 전개는 PC의 반응과 행동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피드백 마스터링의 측면도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일본룰 중에서도 특히 높게 평가해요). 새로운 시스템을 접할 때는 이 시스템이 지향하는 플레이 방식이 어떤 것인지 잘 파악하고 그를 살려서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진행방식과 시스템을 접하면서 TRPG 플레이의 폭도 그만큼 넓어지리라 봐요.



이번 글은 여기서 끝이고요. 질문이나 의견 마음껏 남겨주세요-. [The RPGist] 블로그에서 앞으로 어떤 내용을 다뤘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주시면 고맙고요 ㅎㅎ. 모쪼록 더욱 즐거운 RPG 플레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