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애스디
TRPG를 하다보면 종종 룰에 얽힌 문제와 갈등이 일어나곤 합니다. 여기서는 TRPG 룰을 어떻게 활용할지의 원칙과, 룰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다루려 합니다.
1. TRPG 룰의 활용 원칙.
RPG 룰은 즐거운 "플레이"를 만들기 위한 도구에 가깝습니다. 다른 게임처럼 그 자체로 완결된 규칙이 아니기 때문에, RPG 룰은 플레이 중에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RPG 룰은 플레이 중에 필요하다면 변용하거나 무시할 수 있습니다. 허나 룰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각각의 TRPG 룰은 일정한 스타일의 플레이를 지원하기 위해 잘 고안된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RPG 룰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제가 갖는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룰북에 나온 내용을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최대한 따른다.
2) 룰의 디자인 의도와 원칙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룰을 활용한다.
3) 룰을 그대로 적용하기 힘든 상황이 나온다면, 그 이유를 살펴 해법을 찾는다.
RPG 룰 적용에서 생기는 문제의 대부분은, 룰 자체의 근본적 결함보다는 "룰을 제대로 이해하고 원래의 디자인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접한다면, 룰북을 충실히 읽고 거기 나온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게 중요합니다.
룰 적용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첫째로 룰북의 관련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세요. 룰북의 내용을 오해하거나 잘못 해석해서 생기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둘째로, 룰의 원 디자인 목적을 생각하고 룰을 그에 맞게 적용한 것인지 생각해보세요. 룰을 애초의 목적에서 벗어나 잘못 적용하거나 악용/남용하는 경우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도 달리 해석의 여지가 없다면, 팀의 필요에 따라 룰을 무시하거나 변형할지 정해야겠지요. 이에 대해선 아래에서 상세히 얘기해보겠습니다.
2. TRPG 룰 적용의 문제상황과 해법.
1) 플레이 진행 상 룰을 그대로 적용하면 곤란하다.
룰을 그대로 적용하면 PC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든가, 시나리오가 외통수로 막힌다든가 하는 예가 있습니다. 반면 룰 대로 캐릭터 능력을 활용하면 시나리오의 중요한 전제(정보 통제, 시공간적 제약, 목표의 우회달성 등)가 붕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이런 상황은 미리 방지하는 게 좋지만요.
이런 경우는 대체로 '그 장면에 한해' 룰을 무시하거나 변용하는 식으로 쉽게 해결 됩니다. 시나리오 진행상 곤란하다면, 그냥 "안된다"고 하세요. 팀의 양해를 구해 룰을 무시/변용하면 됩니다. 다만 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된다면 이건 좀더 고질적인 문제일 수 있으니, 하우스룰 등으로 항구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도 좋습니다.
2) 룰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룰의 문구가 모호하거나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 갑론을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논쟁이 길어진다면 일단은 마스터 재량으로 결정짓고 넘어간 다음에, 나중에 다시 짚어보는 게 좋습니다.
룰의 해석은, 원래의 디자인 의도와 실제 플레이 상의 효용을 따라 살펴야 합니다. 문구를 놓고 엄정한 논리 싸움을 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룰을 자기 생각 대로 남용하려 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문구 상 논리에 맞더라도, 룰을 앞세워 자기 이익을 관철하는 식이라면 바람직하지 않겠지요. 시스템이 지향하는 목적과 플레이 스타일을 이해하고, 팀에서 모두가 즐거운 플레이를 위해서 무엇이 나은지에 따라 토의해야 할 터입니다.
3) 룰을 남용/악용한다.
룰을 문구대로 따르는 것만이 최선은 아닙니다. 특히 룰이 남용/악용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플레이를 하면서 "참가자 중 누군가가 계속 불만이 쌓여간다면", 이는 룰의 남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개 룰을 악용하는 자신도 이게 문제라는 것은 알고 있기 나름입니다. 애써 부정하고 자기 이익을 지키려 고집할 순 있지만요.
한 예로, [던전월드] 플레이에서 전사 캐릭터가 낮은 지혜 수치로 '상황 파악' 액션을 반복해 실패(6 이하)로 경험치를 타가려 한다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던전월드]에서 실패(6 이하)에서 경험치를 주는 룰의 의도는, 유리한 능력치 말고 불리한 능력치도 사용하도록 장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안 그러면 전사는 힘 판정으로 가능한 일만 시도할 수도 있으니까요. 경험치를 남보다 더 많이 타려고 '상황 파악' 액션을 반복하는 건 룰의 악용입니다.
이 경우 룰을 원래 의도에서 벗어나 악용하는 것이 잘못이지, 룰 자체가 문제있는 게 아닙니다. 가장 좋은 해법은, 이건 룰을 악용하는 거니 하지 말자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득을 위해 룰을 악용하는 걸 굽히지 않겠다면, 이런 사람과 플레이를 하는 건 즐겁지 않겠지요 (플레이어가 Lawful Evil인 셈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룰을 악용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건강한 플레이의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설득으로 해결하기 곤란한 상황이라면, 룰이 악용될 여지가 없도록 고치는 것도 방편입니다. 위의 예라면, 실패(6 이하)로 얻는 경험치를 세션 당 1점까지 식으로 제한할 수 있겠지요. 이러면 마냥 의미없는 '상황 파악'을 반복하진 않을테니까요.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차선책입니다. 이런 '경험치 노가다'를 막는다고 해도, 룰의 다른 부분을 또 어떻게 악용할지 모를 일이지요...
3. 맺음말
아포칼립스 월드 엔진이나 [페이트 코어] 등 근래 RPG 시스템의 경향 중 하나는, 플레이어가 룰을 자의적으로 활용할 여지를 열어둔다는 점입니다. 예전의 D&D나 GURPS 같은 룰처럼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세세하게 규정하는 것과 다른 방향이지요. 이는 "룰을 악용하지 않으리란 믿음"을 전제로 참가자에게 보다 많은 권한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룰의 원래 디자인 의도를 이해하고 그에 맞게 룰을 써줄 것이라는 기대이기도 하고요.
TRPG 룰은 최대한 존중하고 그대로 살려 쓰는게 좋습니다. 각 시스템마다 고유한 지향점과 디자인 철학이 있으니까요. 그걸 살려서 룰을 제대로 쓰는 게 좋은 플레이의 발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룰의 문구을 얼마나 중시할지, 그보다 팀의 사정을 앞세워 임의로 조정하는 걸 선호할지는 팀마다 정하기 나름이기도 합니다. 팀의 성향에 따라 느슨한 룰을 선호할 수도 있고, 엄밀하게 규정된 룰을 좋아할 수도 있겠지요. 이 자체도 룰의 디자인 철학에 달린 문제니, 그에 맞춰 시스템을 선정해야겠지요. RPG 시스템도 이제 선택의 폭이 넓어졌으니 취향에 맞춰 각 시스템을 적절히 활용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