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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링 강좌

흐름을 타는 마스터링

by 애스디


2008년에 길드타운 난민대책위 플레이를 하면서 배운 점들을 정리한 글입니다. 오승한님의 [피드백 마스터링]과 비슷한 결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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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길드타운 난민대책위 플레이를 하면서, 이전과 달리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 즉석의 '흐름'과 토의에 의존해서 진행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전 시나리오와 NPC 설정을 미리 빡빡하게 정해두는 스타일이었는데, 이번엔 '애드립' 스타일의 마스터링을 해본 거죠. 좋은 팀원들 덕분에 생각보다 굉장히 좋은 결과를 얻었고, 그러면서 경험한 것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1. 지속적으로 얽히며 생명력 얻은 NPC들에서 나오는 흐름.


예전 단편 무협 캠페인에서도 이런 "의외성"의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화북성에 이른 것은 해질 무렵. 고진현이 머무른 객잔은 나이든 사내와 그 딸이 어렵지만 활기차게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북 팽가의 팽 공자와 한량들이 들이닥쳐, 소녀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보다못해 고진현과, 또 한 명 머무르고 있던 석룡광검 갈금귀가 나섰고, 갈금귀의 위협만으로 팽 공자 일당은 혼비백산하여 도망했다. 객잔 주인은 무척 감사하며 진수성찬을 차리고, 한편으로 그가 한때 무공을 쌓았으나 지금은 어떤 이유에선지 내공을 잃었다는 사연이 밝혀졌다.


라는 도입부 장면이었습니다. 10여년 전 정파와 사파 사이의 대혈전에서 정파가 승리한 뒤 사파에게 '산공단'을 써서 내공을 강제로 다 잃게 만들었다는 설정이었죠. 그 '산공단'을 만든 게 PC 고진현의 사부 의선(醫仙). 아무튼 객잔 주인은 그런 사파 무림인 중 한 명으로 산공단으로 무공을 잃은 뒤 얼마나 무력하게 정파에 시달리고 있나...를 보여주기 위한 인물이었습니다. 


근데 어쩌다 보니, 객잔 주인이 딸을 구해준 은혜를 갚으려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하러 가려하는 장면도 나오고, 결국 팽가장 등과 원수지간이 되어 쫓기는 PC들에게 탈출로를 열어주는 역할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PC들은 계속 정파에 쫓기며 부조리를 깨닫게 되고, 월영비라는 사파의 후기지수를 만났고요. 


항주의 객잔에서 월영비와 만난 고진현 일행. 월영비는 산공단을 이용해 정파의 압제를 무너뜨리려는 계책을 종용한다. 산공단의 해약을 통해 사파들이 다시 정파의 악행에 '복수'할 기회를 주자는 이야기... 그리고 파멸적인 복수의 악순환을 반대하는 PC들. 월영비는 이들을 데리고, 빈민가 아지트에 피신 중인 진가 객잔 주인과 딸 향이를 보여준다. PC들을 도운 것 때문에 처참히 고문당하고 병든 주인, 그리고 제 손으로 복수하겠다며 악을 쓰며 매달리는 향이. 사람들의 마음은 복잡미묘해지고 월영비는 무공의 의미는 무엇인지, 협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정파와 사파, 해묵은 갈등과 모순된 상황을 함께 고민하게 되는데...


여기서 생각지도 않게 다시 객잔주인과 딸을 등장시키며 이야기가 훨씬 피부에 와닿게 됐어요. 객잔 주인은 바로 PC들을 도우려다 처참히 고문당해 평생 골병을 앓는 병신이 되었고, 딸은 복수를 하겠다며 PC들에게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매달렸으니까요. 


여기서 저는 PC들과 반복해서 관계맺고 감정이입 되는 NPC가 얼마나 강력한 임팩트를 주는지 배웠어요. 그리고 더 놀라웠던 건 이런 장면을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그저 나왔던 NPC를 필요한 장면에서 자꾸 재활용하다보니 이렇게 되더란 거였죠. 그래서 "가능한한 NPC를 반복해 울궈먹으면" 생각지 못한 효과를 거둘 수 있겠구나... 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2. 플레이어들의 능동적 반응/개입에서 나오는 흐름.


난민대책위 플레이를 시작하면서 처음 잡은 소재는 "구호식량 배급"이었습니다. 구호식량 배급을 둘러싼 분쟁, 비리와 부조리 같은걸 다루고 싶었죠. 근데 시의회에서 마련한 구호식량은 "겨와 지푸라기가 잔뜩 섞인 쌀 포대와 곧 상하기 직전의 밀가루"라는 묘사에 플레이어들이 격분하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러 가자고 하게 됐죠. 원래는 그냥 총독부 직원이 난민들에 몰인정한 시의회를 비판하는 장면이자 배경 묘사 정도였어요. 아무튼 플레이어들이 그렇게 크게 반응해주니까 무척 기분 좋더라고요 (링크 참조).


그래서... 분노한 PC들은 이건 중간에 착복이 있었으리라 짐작하고 곡물상을 찾아갔지만, 사실 애초에 시의회 측에서 할당한 예산이 터무니없이 작다는 걸 알게되고 그런 제도적 차원의 부조리와 직면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초반부터 그런 시의회 vs. 난민의 갈등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더욱이 그 갈등의 양편에 선 PC 루카의 입장이 부각되서 무척 좋았죠. 그쪽 진행은 모조리 애드립이었지만 비교적 잘 되었고, 무엇보다 플레이어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끼어들어서 잘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구호식량 배급 후반 장면에서도 비슷한 전개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신식공방에 취업되어 있는 걸로 되어있는데, 일을 못나가고 있다고 통 사정하며 찾아온 난민 소년이 나왔어요. 원래는 엉겨붙어 떼를 쓰다 안되면 지갑을 소매치기해서 도망치고 뒤쫓아가보면, 딱한 내막을 알게 된다...는 전형적인 도입부였죠. 


그런데 PC 루카가 측은한 마음에 얘를 자기 의류공방에 도제로 들이겠다는 거에요 (링크 참조). 그래서 도제로 들어간 난민 소년이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도둑질을 하고 달아나 뒤쫓게 되는 새로운 시나리오로 가게 되었죠. 이를 통해서 난민들의 생활고, 범죄에 쉽게 빠져들 수 밖에 없는 형편.. 같은게 자연스럽게 부각되서 역시 너무 좋았습니다. 이것도 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인데, 플레이어가 적극적으로 NPC에 감정이입하고 반응한 탓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정리하자면... 플레이어가 상황이나 NPC들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개입할 때, 그런 의외의 행동에서 새로운 흐름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플레이어가 직접 끼어든 일이니 집중도도 높을 뿐더러, 배경세계와 캠페인 주제와 잘 얽히면 굉장한 시너지가 나올 수 있었어요.




3. 생동감 있는 배경세계에서 나오는 흐름.


"구호식량 배급"과 "난민 소년 도둑질" 사건 다음의 시나리오는 "식량창고 약탈사건"이었습니다. 이 시나리오도 사실 애드립(-_-)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원래는 신식공방의 일자리 알선조직(고액의 알선료를 쥐어줘야만 자리를 내주는)을 수사하는 쪽으로 예정했는데, 마침 그날 수비대원 PC가 빠지면서 '본격 수사물'은 어렵게 된 거죠. 그럼 뭔가 다른 소재를 찾자 하다가, 난민들이 시의회 식량창고를 야습해 약탈하는 건 어떠냐 하고 얘기가 되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도 1.에서 얘기한 "NPC 울궈먹기" 테크닉이 주효했습니다. 식량창고 약탈이 일어난 밤, 난민 청년 중 하나가 난민 신지기/약사인 PC와 마주쳐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는데 (일종의 스피커 캐릭터), 나중에 다른 조사 길이 막히면서 이 친구를 찾아가 내막을 따져묻게 되며 관계가 깊어졌죠. PC가 손씻고 떠나라고 종용하지만 결국엔 조직을 떠나지 못하다 처참히 죽어 큰 여운을 남겼죠.


어쨌든 이 친구한테 들은 정보를 토대로 식량창고 약탈사건을 주모한 배후를 캐내게 되요. PC와도 구면이 있는 난민자치회가 실상 난민들에게 보호세를 뜯고 빈민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정해져 있었죠. 하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은 하나도 안 정해져 있었어요. 


수사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누가 경비병들에게 술을 먹여 제압될 수 있게 했을까... 생각하다 보니 역시 술이라면 여자 란 생각에 술집 여급을 댔어요. 그리고 아마 난민이 운영하는 허름한 무허가 술집이겠거니 해서 그런 쪽으로 전개. 여기 술집 여급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다보니, 10대 난민 소녀가 되었고... PC들이 집을 찾아가자, 이 소녀 가장이 부양하는 동생들이 생겨났습니다(^^;). 마침내 술집 주인과 이 소녀를 을러서 이 일을 꾸민 건, 난민자치회의 인물이다.. 란 데까지 이어졌죠. 모든게 그때그때 애드립으로. :D (링크 참조)


이러한 내막에 얽힌 인물이나 수사과정을 미리 정해두지 않았는데도, 배경설정을 살려서 자연스럽게 생각하다보니 너무 술술 풀려서 신기했습니다. 이런 걸 하면서는 배경세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유추되는" 흐름, 가능하면 단순하고 뚜렷한 논리를 따라갔죠. 배경세계가 충분히 생동감있게 머릿 속에 살아있으면, 충분히 흥미로운 전개들이 나올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이렇게 저는 미리 치밀하게 짜둔 설정보다, 오히려 플레이에서 나오는 흐름들을 살리는 경험을 많이 해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준비한 게 별로 없는데 괜찮을까 불안했는데, 어떻게 잘 굴러가더라고요 (^^;;). 서로 호흡이 잘 맞는 좋은 팀원을 만났던 것도 크게 작용했던 것 같고요. NPC와 감정 교류나 능동적인 간섭은 플레이어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죠. 또 배경세계를 생동감 있게 구상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두는 것도 이런 즉흥적 플레이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플레이하며 즐거웠던 점은, 저로서도 생각지 못한 전개가 나와 무척 재미있을 때가 많았다는 거에요. 예전엔 모든 걸 미리 짜맞춰두고, 왜 PC들이 이걸 물고 들어오질 않나 발을 동동 구르며 답답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말이죠. 뭐, 그렇다고 해서 이게 늘 잘 되던 것만은 또 아녜요. 어떤 날은 또 잘 안 풀릴 때도 있더라고요. 그건 아직 풀어야할 숙제인데, 아마도 플레이의 내용이 배경세계가 갖고 있는 흥미로운 점, 생동감이 펼쳐질 수 있는 부분인가에 달린 것 같습니다.


한편... 이것이 '합의에 의한 플레이'에 속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번 난민대책위 팀을 하면서 이런저런 설정을 공개하거나 또 전개를 외적으로 의논한 점도 꽤 많은데, 꼭 그것과 직결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보다 PC를 통한 능동적인 반응과 개입, 그에 대한 마스터의 적극적인 반응이 서로 얽히면서 상승작용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즉, 마스터가 유연하게 플레이어의 관심과 개입을 반영하는 토양이 밑바탕인 듯 해요.


어쨌든 개인적으로 1. 나왔던 NPC를 자꾸 울궈먹으면서 감정이입을 위한 관계를 쌓아가는 것, 2. 플레이어의 관심과 반응, 능동적참여에 적극 호응하는 것, 3. 생동감 있는 배경세계를 두고 자연스런 진행을 풀어가는 것, 이 세 가지로 제가 배운 테크닉을 요약해보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