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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링 강좌

마스터를 이해하는 관점: 대적자 vs. 연출가.

by 애스디


TRPG가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마스터가 맡는 역할도 여러가지로 변해왔습니다. 마스터가 어떤 역할인지에 대해서 사람마다 시스템에 따라 제각각 다양한 견해가 있고요. 여기서는 D&D로 대표되는 고전적 모험물부터 출발해 마스터의 역할에 대한 여러 관점을 다루려 합니다. 




1. 마스터의 기본 역할: "세계"를 담당한다.


마스터를 두는 RPG 시스템에서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근본적인 구분은, 플레이어는 한 명의 PC만을 맡고, 마스터는 "나머지 세상 전부를 맡는다"는 점입니다. 마스터는 PC들이 행동할 흥미로운 상황을 제시하고, 플레이어들의 선언을 받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정합니다. 이렇게 PC의 행동(플레이어의 선택)을 처리하기 위해서, 배경세계와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룰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마스터가 이러한 권한을 발휘하는 것은, 참가자 모두가 재미있는 플레이를 만들기 위해서지요. 어떻게 플레이어에게(그리고 마스터에게) 흥미로운 상황을 내놓고 운영할 것인가에 대해선 여러 방법론이 있습니다. (참고: [RPG 연구실 10b: RPG 플레이의 세 가지 경향])




2. 대적자로서의 마스터: 난관을 내놓는다.


D&D식 던전 모험물 RPG에서, 마스터의 주된 역할은 PC들이 다같이 해결할 '난관'을 내놓는 것입니다. PC들이 한 팀으로 힘을 합쳐 장애물을 하나씩 극복해가며 시나리오 속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플레이어들이 자기 캐릭터를 통해 플레이에 참여한다면, 1) 되도록 모든 캐릭터가 장면에 나와야 하고, 2) 각 캐릭터가 활약할 여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PC들이 힘을 합쳐 난관을 극복하는 던전 모험물이라는 체계가 갖춰진 셈입니다 ([캐릭터를 통한 플레이 참여의 난점과 한계] 참조). 


이런 식의 플레이에서 마스터의 역할은, 플레이어에게 흥미로운 난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각 PC의 능력이 부각되면 좋고, 특히 플레이어가 창의적인 해법을 내놓을 수 있으면 좋습니다. 제일 쉬운 방법은 전투입니다. 보통 룰에서 가장 상세히 다루고 써먹을 재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외로 주요 인물을 설득하는 대화 장면이나 플레이어의 재치를 요구하는 난관, 퍼즐을 장애물로 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되도록 정밀한 룰이나 논리에 따라 플레이어의 선택을 처리할 기준이 필요합니다. 


RPG를 게임이라 다루는 마스터는 이러한 난관을 "플레이어의 판단과 능력을 시험"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플레이어가 적합한 선택을 하면 승리하고, 실수를 하거나 주사위 굴림이 나쁘면 죽고 패배할 수도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실제 플레이에선 어떻게든 PC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하는 쪽으로 배려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데드엔드가 될 것 같으면 살아날 길을 제시하고, 전투에서 몰살될 것 같으면 중간에 주사위를 속이거나 수치를 바꾸는 식 등으로요. 대부분은 PC들이 결국에 승리하는 결말을 선호하니까요. 처음부터 PC들이 거의 이길 수 없을 것 같이 몰아붙였다 극적으로 이기는 장면을 연출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이는 RPG 플레이에서 엄밀한 게임보다 드라마틱한 '서사'를 추구하는 예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연출가로서의 마스터: 극적인 전개를 유도한다.


극적인 장면을 중시한다면, 위와 같이 엄밀한 게임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임적/전략적으로 옳은 결정이 아니라, 극적으로 흥미로운 선택을 하게 두면 됩니다. 개별 장면의 성공/실패도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플레이가 정체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이어져가는 것입니다.


같은 환타지 모험 장르라고 해도, 던전월드는 이런 점에서 D&D와 다릅니다. 게임/수치 면에서 유리한 판단을 하는 것보다, 플레이 속에서 얼마나 극적이고 흥미로운 장면이 나오는 지에 주목합니다. [페이트 코어] 같은 룰도 마찬가지고요. 룰이 게임적 판단 기준으로 기능하기보다, 다양한 이야기 속 상황을 반영하고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서사 위주의 플레이에선, 마스터와 플레이어 모두 PC의 실패나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집중합니다. 예를 들어 [Call of Cthulhu]처럼 점차 공포의 실체에 다가가면서 결국 미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도 즐길 수 있지요. 그 과정이 얼마나 흥미롭고 몰입되는 지가 관건입니다.


연출가로서 마스터는, 1) PC 중 누군가가 중대한 문제나 갈등에 부딪치고, 2) 모두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장면을 만드는 것이 주 역할입니다. 장면 단위로 플레이를 진행하면서 개별 PC 부각시키면 좋을 것입니다. PC 여럿이 서로 갈등에 휘말리거나 부딪치는 장면도 유용합니다 (반면 PC간 대립은 D&D식 플레이에선 대개 기피됩니다). 장면 속에서 PC가 어떤 인물로 드러나는지, 중대한 상황에서 어떤 결정과 행동을 하는지, 그것이 무슨 결과를 낳는지에 주목해보세요.




4. 마스터가 연출과 진행을 전담해야 하는가?


마스터가 나름대로 각 PC들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극적인 무대와 전개를 준비해 플레이 속에서 펼쳐내는 시도도 가능합니다 (WOD 마스터링이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마스터가 예상하고 준비한 대로 플레이어가 반응하지 않는 일도 태반이고, 마스터 혼자 준비한 완성도 높은 플롯은 대개 생각처럼 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한편 [피아스코]나 [폴라리스] 같은 시스템을 보면, 이런 인물 중심의 서사적 플레이를 하는데 꼭 마스터를 둘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보다 참가자 모두가 서로의 인물을 관심 갖고 이해하며, 인물이 가진 갈등과 이야깃거리를 살려내는 게 중요합니다. 모두가 장면에 같이 참여하고 아이디어를 모을 때 더욱 흥미로운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고요. 


처음에 얘기한 대로 마스터의 역할은 'PC 외의 나머지 세상, 조연과 배경을 맡는 것'입니다. 일종의 무대 세팅과 연출이라고 봐도 좋겠지요. 연출자로서의 마스터가 준비한 배경과 플롯도 있겠지만, 플레이 속에선 PC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가에 최대한 집중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연출자로서 마스터의 왕도는 'PC들이 부각되는 극적인 상황을 제시하고, PC들의 행동과 그에 따른 전개를 지켜보는 것'이라고 정리하지요.


특히 플레이를 준비할 때, PC에게 극적인 갈등을 낳을 배경과 무대를 마련하고선 PC들이 행동할 자유를 열어놓으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플레이를 통해 알아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포도원의 개들]의 마을 설정이나 [던전월드]의 국면이 이렇게 서사의 기본 무대를 유지하면서 전개 가능성을 열어두는 예에 속하고요. 이런 마스터링 기법에 대해선 추후에 기회 되면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맺음말


마스터에 관한 이 관점들이 반드시 배치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플레이를 준비하고 진행할 때, 기본적으로 어떤 접근을 추구할지 생각해보면 좋을 거에요. 특히 TRPG 시스템을 고르고 사용하는데 있어, 각 시스템이 어떤 식의 플레이에 맞는지 이해하고(양쪽이 모두 가능한 시스템도 있지만) 적절히 사용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