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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연구실

캐릭터를 통한 플레이 참여의 난점과 한계

by 애스디


RPG에서 플레이어는 주로 자신의 캐릭터(Player Character, PC)를 통해 플레이에 참여합니다. 특히 전통적인 RPG 형태에서 PC는 플레이어가 플레이에 참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런데, 이 점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낳습니다.


1. PC가 움직일 여지가 없으면, 플레이어가 할 일이 없습니다.


가장 극적인 예는, PC가 죽거나 의식을 잃거나 따로 떨어져서 배제된 경우입니다. 전통적인 플레이 형태에서는 이럴 때 해당 플레이어는 구경꾼(...)이 됩니다.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거나 평을 늘어놓을 순 있지만, 이 것이 플레이에 적극 반영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PC를 직접 움직이는 것만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선 플레이 중에는 늘 PC가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여야 합니다. 즉,


2.1. 플레이어의 참여를 위해, PC는 가급적 모든 장면에 등장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PC가 장면에 참여하려면, PC들이 물리적으로 함께 다녀야 합니다. 즉, PC들은 어떻게든 일행을 이뤄다녀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하지만, 플레이를 해보면 알겠지만 늘 그렇게 되지만은 않고, 또 많은 이야기 매체에서 주인공들이 따로 떨어져서 행동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이런 점이 일단 문제가 됩니다. 헌데 그 뿐만이 아닙니다.


2.2. 의미있는 참여를 위해, PC는 가급적 모든 장면에서 활약할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단순히 해당 장면에 PC가 등장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해당 장면에서 "활약"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지는 장면에서, 전투에 완전히 무능한 PC는 실질적으로 의미있는 개입을 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해당 상황에 처한 캐릭터를 연기할 순 있지만, 해당 장면에 의미있게 참여하기 힘들다는 것이죠.). 반대로, NPC와 대화/교섭 장면에서는 대인관계 능력이 전무한 육체파 PC가 별달리 할 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려면, 플레이어가 PC를 만들 때, 어떤 장면에서든 행동할 수완을 갖추는 것이 첫째겠습니다 (PC가 만능이어야 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비전투형 캐릭터라도 전투 장면에서 최소한 보조적인 역할이나마 하는 쪽이 낫다..는 것이죠.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로, 전통적인 방식의 플레이인 경우, 마스터가 "각 PC 모두가 활약할 여지를 넣어서 장면을 구상"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한편,


3.1. PC가 늘 함께 다니며 같은 장면에서 활약하려면, 어느정도 비슷한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3.2. 그러면서도 PC들끼리는 차별화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PC들끼리 배경과 능력이 너무 차이나면, 1) 같이 다니기 어렵거나, 2) 한 장면에서 모두가 활약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개별 PC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장면은 있겠지만, PC끼리 너무 차이나서 한 쪽이 활약할 때 다른 캐릭터는 플레이에서 완전히 배제되거나 하는 쪽은 곤란합니다. 한편, 그렇다고 PC들끼리 죄다 비슷비슷해져 버리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던전물은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PC들은 대개 늘 같이 움직이고, 등장하는 장애물(주로 전투)에 대응할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개별 PC들이 구별되기 좋게 역할을 분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상호보완적인 능력들이 한 장면에" 쓰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던전 크롤링이라는 제한된 상황을 전제해, 다양한 캐릭터 타입이 공조하도록 짠 "틀"이지요. 문제는 던전 크롤링을 넘어선 플레이를 하려고 할 때입니다.



던전물 외의 플레이에서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세 가지입니다.


4.1. 던전물과 비슷한 틀로 맞춥니다. 즉, 잘 분담된 역할이 한 장면에서 모두 필요하게 구성합니다.


4.2. 각 PC의 고유 능력 외에 일반적인 활약을 추구합니다. 예를 들어, 밤중에 싸우는데 누군가 등불을 비춰준다든가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캐릭터의 수치적인 능력 외에 플레이어의 RP로 교섭 장면을 채운다거나 하는 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4.3. 플레이어가 PC 외의 수단으로 플레이에 참여합니다. 다른 사람의 판정에 플롯 포인트를 써서 개입한다거나, 조역 NPC를 움직인다거나, 장면 진행에 대해 다양한 제안, 논평을 통해 참여하는 등이 가능합니다.



던전물 RPG가 초심자에게 쉽다거나, 혹은 짜임새 있게 느껴지는 것은, "캐릭터만을 통해 플레이에 개입"하는 것을 지원하는 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던전 크롤링으로 상황을 제한해, 어느 장면에서건 PC가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잃는 것도 있습니다. 주어지는 상황, 캐릭터 타입 등이 명료하게 제한되어야 하고, 또한 많은 부분을 룰로 처리하면서 "최적화"의 유혹을 낳게 됩니다.


따라서 던전물 외의 플레이에선, PC들끼리 1) 어울려다니고, 2) 함께 활약하고, 3) 차별화되기 위한 고려가 필요합니다. 한편, PC들끼리의 차이가 꼭 시트로 표현된 능력 면에서 두드러질 필요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클래식 D&D나 AD&D 같은 경우 파티에 전사 2명이 있을 경우, 룰적인 면에서는 약간의 능력치(누가 더 힘이 높나)와 웨폰 마스터링 밖에 차이가 없지만, 많은 팀에서 각자 자신만의 캐릭터를 충분히 살렸으니까요. 비슷하게 천승민님의 무한세계 플레이에서도, '무한경비대원' 템플릿을 사용해 기초 능력은 거의 비슷하면서 약간의 개인 특기(최대 30-40CP 가량?) 차이만 났는데도, 충분히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같이 활동하기에 무리가 없으면서도요.


결국 1) PC가 같이 다녀야 한다, 2) 모든 장면에 활약할 수 있어야 한다 라는 제약을 넘어선 플레이를 추구한다면, 플레이어가 캐릭터 이외의 방편으로도 플레이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즉, 누군가 개인 세션을 하는 동안에도 손가락만 빨지 않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면, 플레이의 폭이 넓어질 수 있을 듯 하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안(4.3)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