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애스디
TRPG라고 통칭해서 부르지만, 실제 플레이 양상은 다양하게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GSD 삼단모델(threefold model)에 기초해, '게임주의(Gamist)' 플레이 경향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더불어 이를 RPG의 4시점론에 접목해, RPG 플레이에서 "게이머(Gamer)" 시점의 가능성을 얘기하고요.
1. GSD 삼단 모델과 게임주의 플레이
GSD 삼단 모델("threefold model")은 RPG 플레이의 운영방식에 크게 세 가지 경향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Session의 [RPG 연구실 10b: RPG 플레이의 세가지 경향]을 참고해주세요.)
- 게임주의(Gamist): 플레이어가 주어진 난관(challenge)을 극복하는데 주목하는 스타일입니다. 이는 전술적 전투나 지적인 미스테리, 정치적 상황일 수 있습니다. 마스터는 지능적으로 대처하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를 내놓고, 플레이어의 해법과 선택을 시험하는 식입니다.
- 모사주의(Simulationist): 플레이 중에 일어나는 일들을 순수히 플레이 속 세상과 그 정합성에 따라 정하는 스타일입니다. 배경세계를 최대한 충실히 재현하는 게 우선이고 다른 메타게임(게임주의나 극주의)적 요소는 가능한 배제합니다.
- 극주의(Dramatist): 플레이 속 사건을 통해 만족스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집중합니다. 어떤 식의 이야기를 추구할 지는 참가자들의 취향에 따라 다르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고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데 치중합니다.
원래 GSD 삼단 모델은 마스터가 플레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하느냐에 관한 이론입니다 (모사주의의 설명을 보면 알 수 있지요). 하지만 각 유형이 마스터 및 팀이 지향하는 목표와도 관련되어 있고 그에 따른 플레이 스타일을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플레이 스타일을 꼭 이 셋 중 하나로 분류해야 하는 건 아니고요. 각 경향이 일정한 비율로 섞여있을 수 있습니다. [RPG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의 비율에 관하여] 참조).
이 글에선 "게임주의"에 기반한 마스터링과 플레이 양상을 살펴보고, 이에 대응하는 "게이머"로서의 시점을 다뤄보려 합니다.
2. 게임주의 플레이와 룰의 활용.
게임주의 플레이, 혹은 게임으로서의 RPG를 얘기하면 가장 먼저 '전투 인카운터 위주의 플레이'를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게임주의 플레이는 꼭 전술 전투에 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GSD 삼단 모델에서 "게임주의"는 마스터가 플레이어에게 일정한 과제(장애물)를 내고, 이를 해결하는 플레이어의 역량을 시험하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추리물 플레이에서 단서를 모으고 추론하는 플레이어의 역량을 시험한다면 게임주의의 좋은 사례입니다. 대화 상황에서 플레이어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 논리를 대고 적합한 접근을 취하는지 본다면, 역시 마찬가지고요. 전투 든 다른 상황이든,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플레이어의 창의적인 해법을 촉구하고 이를 포상한다면 역시 "게임주의"에 입각한 마스터링입니다.
룰을 써서 판정하는 것 자체는 "게임주의"와 직접 연관이 없습니다. 앞선 예와 같이 추리력, 퍼즐 풀기, 논변 같은 플레이어의 역량을 직접 시험할 수도 있으니까요. 오히려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과 접근을 취하든 상관없이, PC의 실력과 판정에 따라 결과가 정해진다면 이는 "게임주의"랑 관계 없습니다. 이건 "모사주의"(PC의 실력)에 입각한 판정에 속하겠지요. 한편 가능한 수단으로 협박과 교섭이 있고 플레이 속 단서를 토대로 둘 중에서 옳은 선택을 할지를 가늠한다면 이는 '게임주의'에 속합니다.
결국 게임주의 플레이에서 "룰의 역할"은 플레이어가 내리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RPG의 구조와 "의미 있는 선택"] 참조). 룰을 바탕으로, 참가자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 각각이 일으킬 결과를 가늠하고 더 나은 쪽을 고를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올바른 선택을 포상한다면 "게임주의" 플레이가 되지요. 이에 따라 룰의 이해와 활용능력, 창의력과 재치를 시험하는 방편이 될 수 있고요. D&D 등에서 마법사 캐릭터가 센스 있는 주문 사용으로 상황을 해결하는게 흔한 사례겠지요.
이렇게 룰에 바탕한 "게임주의" 플레이를 하려면, 룰이 플레이 속에서 가능한 행동과 그 결과를 상세히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룰이 다루지 않는 영역은 플레이 속 세상에 대한 설정과 전제에 기초할 수 있지만, 그만큼 불명확해지니까요 ("라이트닝 볼트를 금속 바닥에 때리면 전원 감전되지 않나요?"). 이렇게 명시적인 룰에 바탕한 게임주의 플레이는, "룰 기반 게임주의"라고 보다 좁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3. RPG 플레이의 "게이머" 시점
한편 RPG 참가자는 플레이 중에 작가, 관객, 인물, 배우의 4가지 시점을 동시에 갖는다는 4시점론(四視點論)이 있습니다 (근래에는 인물/배우 시점을 인물 시점 하나로 통합해 3가지 시점으로 보는 추세라고 합니다). 4시점론에 따르면, 마스터는 작가 시점의 참여가 많고, 플레이어는 인물 시점이 강조된다고 보지요. 한편 4시점론은 주로 연극 등의 장르에 근간한 시점이기 때문에, 이것만으론 RPG 참가자의 시점을 온전히 설명하는데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게임주의 플레이 양식에 대응하는 참가자 시점으로 "게이머"(Gamer) 시점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게이머" 시점은, '플레이 속 상황, 단서와 룰을 바탕으로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최적의 해법을 고르려는 시점'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요. 플레이 속 상황을 극복해야할 문제(challenge)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다른 시점과 구분됩니다. 인물 시점과 겹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캐릭터에 몰입하고 캐릭터가 할법한 행동을 취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 밖 시각에서 문제상황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다르지요. 플레이어의 메타게임적 지식이 활용될 수도 있고요.
제 경우에는 근래에 D&D 5판 플레이를 하면서, 제가 캐릭터를 움직이는 방식에서 이런 "게이머" 시점을 크게 의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캐릭터로서 행동하고 대화하기보다, 게이머 시점에서 상황을 분석하고 해법을 찾고 게임말로서 캐릭터를 움직인 경향이 컸거든요. 이전의 다른 D&D 플레이에서도 그런 경향이 많았고요. 이전 글 [마스터를 이해하는 관점: 대적자 vs. 연출가]에서 다룬 '대적자로서 마스터의 역할'을 강조하는 게 이런 부류의 RPG 시스템이라고 봐요.
특히 좁은 의미의 "룰 기반 게임주의" 플레이와 어우러지면, 게이머 시점은 "주어진 상황에서 보다 효율적인 선택"을 추구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인물 시점이나 작가/관객 시점 같은 다른 시점과 서로 충돌할 수도 있고요 (이런 다른 시점 간의 상호작용도 RPG의 중요한 일면 중 하나라 봅니다).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 누군가는 게이머 시점을 중시하고, 다른 사람은 작가/관객 시점(극주의)이나 인물 시점(모사주의)을 중시할 수도 있겠지요. 플레이 계약 측면에서 보자면, 각각의 시점/방향성을 어느 정도 중요도로 둘지 합의해야겠지요. 현실적으론, 대개 어느 RPG 시스템을 골라 쓰느냐에 따라 이를 암묵적으로 가정한다고 보고요.
* 캐릭터 빌드 최적화에 대하여.
전투가 강조되는 시스템에선 캐릭터 빌드를 최적화하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 또한 "게임주의"에 입각한 효율적인 선택의 한 사례로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게임적 의사결정이 캐릭터 제작 단계에서 끝나고, 이후엔 최적화된 능력 위주로 움직이니 정작 플레이 속의 "게임주의"적 의사결정이 줄어드는 경우도 많은 듯 합니다. 본래의 "게임주의" 플레이는 플레이 속에서 매번 지능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인데, 캐릭터 최적화 때문에 각 상황에서 취할 행동이 뻔히 정해지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상적으론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이를 창의적/지능적으로 써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본래의 "게임주의"에 가깝겠지요.
* 맺음말
"게임주의" 마스터링과 "게이머" 시점은 RPG 플레이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D&D 등의 시스템에선 이쪽이 주류라고 봐도 되지요. 그에 반해선 이런 "게이머" 시점에 대한 고찰은 그간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RPG 참가자의 다른 시점(작가, 관객, 인물)과 함께 게이머 시점이 어떻게 작용할지에 대한 연구가 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더불어 팀의 플레이 방향성을 같이 맞춰가는데 있어서도 이런 부분이 활용되면 좋겠습니다. 각 RPG 시스템과 그 플레이 방식을 이런 이론에 비추어 분석해보는 것도 유용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