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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연구실

[GSD 이론] '전투'를 통해 본 게임주의, 모사주의, 서사주의.

by 애스디


게임주의를 다룬 지난 글에 이어서 GSD 삼단모델(threefold model)에서 나온 세 가지 TRPG 플레이 유형을 계속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은 게임주의, 모사주의, 서사주의 이 3가지 플레이 유형이 TRPG에서 '전투'를 어떻게 보고 다루는지 살펴보려 해요. '전투'에 대한 관점을 통해 각각의 플레이 유형이 어떻게 다른지 잘 보여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1. 게임주의(Gamist)에서의 전투.


게임주의는 기본적으로 마스터가 내놓은 난관을 플레이어가 지능적으로 해결하는 데 주목한다고 얘기했지요 (지난 글 참조). 따라서 '전투' 역시 플레이어가 지능적인 판단과 전술을 펼쳐내보는 무대로 작용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플레이어가 전투 속에서 얼마나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지고, 이를 공정하게 판정해 전술적으로 적합한 선택에 보상을 주는 것입니다.


게임주의 플레이에서 캐릭터는 이런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게임 말"에 가깝습니다. 캐릭터가 가진 능력을 바탕으로 플레이어는 주어진 전투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을 찾고 집행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게임주의 플레이에선 캐릭터의 성격, 인물됨은 이런 플레이어의 판단에 영향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내 캐릭터는 저 오크 두목이랑 원수지만, 여기선 적 마법사부터 제거하는게 유리하니까..."). 


게임주의 플레이의 전투는, 때로 마스터 vs. 플레이어 간의 대결, 워게임이 되기도 합니다. 최초의 RPG가 탄생한 원류였던 미니어처 워게임으로의 회귀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일 대 일로 군대를 움직였던 것에서, 마스터 1명 vs. 플레이어 여럿이 대결하는 식으로 바뀐 것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미니어처 워게임과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결과를 가릴 수 있는 세세한 전투 룰이 선호됩니다. 즉, 게임주의 관점에서 보면 TRPG의 전투 룰은 전술적으로 유리한 선택과 불리한 선택을 나누고 그에 따라 공정히 피드백을 주는 시스템이어야 합니다. 


많은 RPG 시스템이 주사위 등 난수를 쓰고, 전투에서 이런 난수가 작용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극도의 게임주의에선 이런 불확실성은 배제되는 쪽이 더 바람직합니다. 플레이어가 옳은 선택을 한다면, 난수의 불확실성을 통제하고 승리를 따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선택을 했음에도 주사위 운이 나빠서 패배하는 것은 게임주의에선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D&D를 예로 들어 보자면, 적절한 주문 시전으로 전투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이에 해당하겠지요. 전투 이전에 정보를 수집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서 전투 시작 전부터 승리를 확고히 해두는 것도 가능하고요.




2. 모사주의(Simulationist)에서의 전투.


모사주의는 말 그대로 전투에서도 플레이 속 세상의 현실을 순수하게 모사(simulate)하는데 치중합니다. 배경세계의 설정과 법칙 상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예전에 했던 AD&D 캠페인에서 PC들이 있는 집 주변에 암살자가 석궁으로 무장하고 대기하던 상황이 있었습니다. 석궁 한 방을 맞아도 HP 룰 상으론 죽진 않을 것 같아서 창 밖으로 뛰쳐나간다고 했더니, GM이 석궁에 맞으면 즉사할 확률(시스템 쇼크)을 굴리게 할 거라고 말리더군요. 이는 세계의 법칙상, 저격을 받으면 그만큼 목숨이 위험하다고 마스터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사주의 플레이에선 되도록 룰이 이러한 플레이 속 세상의 현실을 적합하게 반영하고 모델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애초부터 그런 룰(GURPS가 이렇게 쓰기 좋지요)을 쓰면 좋지만, 마스터가 판단하기에 룰이 배경세계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면, 현실이 더 우선하는 것입니다. 과거 논란이 됐던 20레벨 전사가 20층 높이에서 떨어지면 사느냐 죽느냐를 예로 들 수 있겠지요. 모사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이 세상의 법칙은 어떤가'란 질문입니다 (판타지 모험 영웅이니 이런 것도 말이 되는 세계인지?).


한편, 전투에 참가하는 각 캐릭터 역시 그 인물이 가진 지식과 동기에 따라 롤플레이를 하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이야기 속 인물이 실제로 전투 속에서 할법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게 전술적으로 불리하더라도요!). 소극적으로 보면, 각 캐릭터가 알 법한 지식 내에서 판단, 행동해야 하는 것이고 (이 정도의 제약은 게임주의 플레이에서도 채택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전투에 익숙치 않은 캐릭터는 애초에 겁을 먹고 주저앉거나 도망치는 등 불리한 행동을 하는게 맞을 수도 있겠지요.


룰에서 주사위 굴림 등 난수를 활용하는 것도 모사주의에서는 플레이 속 세계를 좀더 객관적이고 정량적으로 모사하기 위해서 입니다. 극도로 모사주의적인 시스템에선, 전투 속에서 각 캐릭터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까지도 시뮬레이션의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전투원의 사기(moral)에 관한 룰은 이를 반영하는 사례로 볼 수 있겠지요.




3. 서사주의(Dramatist, 극주의)에서의 전투.


서사주의 플레이에서 전투는 흥미롭고 짜릿한 이야기와 장면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소재입니다. 전투에서 얼마나 흥미진진한 장면과 전개가 펼쳐지고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주된 관심사지요. 이를 위해선 위의 게임주의(전술적 선택의 공정한 평가)나 모사주의(가상세계의 현실성 반영)를 얼마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PC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지만 힘겹게 보스를 쓰러뜨리는 전투 장면을 만든다고 봅시다. 게임주의 플레이에선, 실제로 플레이어가 전술적으로 좋은 판단을 해서 보스에게 승리해야 합니다 (즉, 선택에 따라 패배도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모사주의 플레이에선, 어떻든 세상의 내적 현실 상으로 보스에게 승리할만한 가능성이 있고 주사위 굴림이 그에 맞게 나와야 하고요. 하지만 서사주의 플레이에선, 플레이어가 전투에서 실수를 하거나 주사위 굴림이 안 좋아서 전멸할 것 같더라도, 즉석에서 데이터를 바꾸거나 다른 변수를 투입해서라도 PC가 어렵사리 승리하는 쪽으로 장면을 만드는 것입니다. 마스터가 주사위 굴림 결과를 뒤집는다면, 이는 거의 100% 서사주의에 따른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결과가 나오면 곤란하지").


서사주의 플레이라고 해서 어떤 전투의 결과나 전개가 꼭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포도원의 개들]이나 [페이트 코어] 같은 서사주의 지향의 룰에서 전투는 PC가 승리할 수도 패배할 수도 있는 갈등인 쪽이 바람직합니다. 전투 속에서 PC가 어떤 극적인 액션과 장면을 펼치느냐만이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 이야기의 분기가 어떻게 나뉘는 지도 중요하고요 (PC가 패배해 적에게 사로잡혔다더라도, 탈출 씬으로 다음 장면을 이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전투 도중에 캐릭터나 세계에 지속되는 파급효과가 생기고, 이것이 이후 전개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 페이트 코어의 "타격" 면모). 최소한 전투에서 대결했던 양 측의 관계와 상황이 그 전과 같진 않겠죠. 한쪽이 이번에 죽든 살든 간에요. 


서사주의 플레이에서 전투 룰은, 예상치 못한 극적인 전개를 낳기 위한 도구입니다.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한 싸움에서 거짓말같이 질 수도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지요. 더불어 전투 와중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과 그 파장을 이야기 속 세상에 반영하고 이후에 활용할 수 있으면 이상적입니다. 전투 자체를 다루는 것만큼이나, 전투를 통해서 이야기 흐름과 상황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중요한 것이지요.




4. 사례 분석: '캐릭터의 죽음'을 다루는 3가지 관점.


마지막으로 게임주의, 모사주의, 서사주의의 이 3가지 유형이 '캐릭터의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통해 이들을 비교해보려 합니다.


게임주의에서 '캐릭터의 죽음'은 플레이어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페널티입니다. 캐릭터가 죽거나 패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혹은 이를 감안해서) 전술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해야하는 것이지요. 반면, 캐릭터의 죽음이 플레이어의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면 이를 면하거나 뒤집을 가능성이 있는 쪽이 바람직합니다. D&D 처럼 부활이 일상적인 설정이라면, 아예 PC의 자원(부활 주문이나 비용)을 소모하는 게임적 방편일 수도 있습니다. 


모사주의에서 '캐릭터의 죽음'은 플레이 속 세상의 현실법칙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 세상의 현실 상 캐릭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면 죽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죽을지 살지 불확실한 상황이라면, 이를 정량적으로 다루는 룰을 통해 해결하겠지요. 이야기 흐름 상의 고려는 여기서 반영되지 않습니다.


서사주의에서 '캐릭터의 죽음'은 극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저 PC의 실수나 주사위의 불운 만으로 죽음이 결정되어선 안됩니다. 혹 판정 결과 상 캐릭터가 죽는 결과가 나왔다면, 이를 어떻게 극적으로 풀어낼 지가 다음의 과제가 됩니다. 캐릭터가 죽게 되더라도, 극적으로 그에 걸맞는 연출과 서술을 두게 될 것입니다.





맺음말


"흥미로운 얘기인데, 내 플레이는 이 3가지 중 하나로 딱 설명할 수가 없어요!" 라고 하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GSD 삼단모델의 이 세 가지 유형이 반드시 배타적으로 셋 중 하나로 나오진 않으니까요. 오히려 이 셋이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각각의 비율로 섞여 있거나 동시에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모사주의에 기반한 룰을 게임주의 목적으로 활용하는 일도 흔합니다. 


하지만, 같이 플레이하는 팀원끼리 의견이 충돌하거나 할 때에 각자가 위의 세 유형 중 무엇을 중시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겠지요. 위의 세 유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취향도 있겠지만, 적어도 논의의 발판은 되어줄 것입니다. 새로 팀을 만들어 어떤 플레이를 할지 의논할 때에도, 위의 세 유형 중 어느 것을 중시할 지 뜻을 모아도 좋을테고요. 또한, RPG 시스템을 익히고 활용할 때도 각 시스템이 위의 3가지 플레이 유형 중 어떤 방식을 주로 지원하는지 참고하는 것도 유용할 거에요.


아무쪼록 RPG 플레이를 즐기는 데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GSD 삼단모델에 관해선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를 더 풀어보려 합니다. 혹 이견이나 질문 있으면 언제든 달아주세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