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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연구실

[번역] TRPG에서의 스토리와 서사 패러다임 (by John Kim)


GSD 삼단 모델을 제시했던 John H. Kim이 쓴 [Story and Narrative Paradigms in Role-Playing Games]을 번역해 소개합니다. 전통적인 정적인 이야기 매체(소설, 영화 등)에서 스토리 전달 과정을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RPG 플레이에서의 스토리 경험에 관한 두 가지 패러다임(공동 이야기 창작 vs. 가상체험)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두 패러다임이 GSD 삼단 모델의 서사주의와 모사주의 플레이 유형과도 얼마간 맞닿는 면이 있다고 생각되네요. 




TRPG에서의 스토리와 서사 패러다임.

Story and Narrative Paradigms in Role-Playing Games

by John Kim


플롯, 테마, 스토리와 같은 전통적인 서사 개념은 RPG 플레이를 설명하는 데에도 흔히 쓰입니다. 하지만, RPG는 소설이나 영화 같은 서사 매체와는 근본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그 결과 RPG에서의 “스토리”를 논의하는 일은 종종 마구 뒤섞인 전제들에 막혀 지지부진합니다. 저는 소설과 영화에서 “스토리”의 의미를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파헤치고 이를 RPG에 적용함을 통해, 이론적 분석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정적인 서사”(static narrative)라고 지칭하는 특정한 유형의 소설과 영화를 예로 들려 합니다. 이런 형태의 이야기는 작가가 고정된 물리적 형태로 작품을 만들고, 이후 관객이 이를 감상한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연극 무대나 이야기 구연 같은 좀더 인터랙티브한 서사 형태도 있지만, 주제를 좁히기 위해 여기선 그런 부류는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 이론적 분석에서, 저는 판매량의 다수를 차지하는 (고전적인) 주류 TRPG 플레이를 살펴볼 것입니다.


이들을 비교해봤을 때, 저는 RPG에서의 “스토리”에 관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서로 다른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두 가지 서사 패러다임(narrative paradigm)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어떤 목표나 테크닉이 아니라, 서사적인 의미에서 RPG가 어떤 것이냐 하는 서로 다른 해석입니다. 각각의 패러다임에서 비슷한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달라보일 것입니다. 각 패러다임은 무엇이 스토리냐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차이를 이해함을 통해 RPG에서의 스토리를 좀더 생산적으로 논의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 분석의 일환으로 정적인 이야기의 모형을 대체적으로 정의해 놓았습니다. 매우 단순화하긴 했지만, 이 모형의 기본은 스토리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에 널리 깔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모형은 아주 정확하거나 보편적이지 않더라도, 전통적인 견해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 실린 관점은 Tzvetan Todorov와 Gérard Genette의 이론[1]을 제 나름대로 이해한 것에 크게 영향 받았습니다. 더불어 이 글의 RPG에 대한 관점은 Liz Henry의 칼럼 "Power, Information, and Play in Role Playing Games."[2]과 The Forge 포럼 [3] 및 rec.games.frp.advocacy [4]에서 이뤄진 논의에 주로 영향받은 것입니다. 






정적인 서사에서의 스토리 Story in Static Narrative


정적인 서사는 독자와 분리된 채로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를 두고 있습니다. 이론적인 관점에서, 이 작업은 스토리(story)와 담화(discourse)의 두 파트로 나뉩니다. 스토리는 인물과 배경을 포함해 상상해낸 일련의 사건들입니다. 이는 무엇이 일어나는지 마음 속의 눈으로 본 그림 같이, 한 사람의 상상 속에 있는 정신적 구상물입니다. 담화는 이 스토리의 표현입니다. 즉, 이 사건들을 나타내기 위한 단어들이나 영상들이죠. 스토리는 작가의 마음에서 시작되고, 이후 매체에 담긴 담화로서 표현됩니다. 이 매체를 봄으로써, 관객은 자기 마음 속의 구상물로 스토리를 형성시킵니다. 이는 아래 그림과 같이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림 1: 정적인 서사에서의 이야기 전달.


이 그림은 다양한 서사 형태를 감안할 때, 여러 면에서 지나치게 단순화된 모형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전통적 모형을 먼저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다음을 정의해봅시다:


상상한 이야기 (Conceived Story)

작가의 마음 속에 있는 구상으로, 일련의 가상의 사건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간단한 모형에서, 상상한 이야기는 언어보다 앞서 이야기의 표현과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작가는 같은 스토리를 다른 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책과 영화 등으로요.


지각된 이야기 (Perceived Story)

독자의 마음 속에 있는 정신적 구상입니다. 상상한 이야기처럼, 지각된 이야기도 사건들에 대한 심상들로 언어에 매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관객이 자기가 방금 본 영화를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크린의 영상을 묘사하기보다 그 안에 벌어진 사건을 서술하려 할 것입니다.


매체 (Media)

책, 영화, 음성과 같이, 작가와 독자 사이를 소통하는 물리적 수단입니다. 이 모형에서 매체는 이야기의 표현을 일체 담지 않은 백지 상태로 봅니다.


담화 (Discourse)

담화는 이야기를 특정한 식으로 표현해낸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스토리는 주어진 서사에 무엇이 들어 있나이고, 담화는 그것이 어떻게 담겨 있나 입니다. 혹자는 이를 “텍스트text”(물리적 작품)와 “서술narration”(유추된 표현 과정)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스토리는 표현물(예: 책의 문장이나 영화 필름) 그 자체가 아닙니다. 스토리는 그보다 심상이나 모형 같은 상상 속의 구성물입니다. 매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상상한 대로의 스토리를 독자에게 전달하려 합니다. 매체를 접한 뒤, 독자는 자기 머리 속에 또다른 상상의 구상물(지각된 이야기)를 갖게 되고, 이는 작가의 구상과는 차이 날 수 있습니다. 


이 모형에는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이 있습니다. 저는 특히 RPG에 관한 시점에서 이들 중요 사항 중 몇 가지를 강조하려 합니다.


1. RPG는 매체가 아닙니다. 반면 대화는 매체입니다. RPG는 갖가지 매체(TRPG 플레이에선 대화, ORPG에선 온라인 채팅 등)를 이용해 구현될 수 있는 체계입니다. RPG는 하나의 형식(작가-독자 관계)으로 볼 수도 있고, 표현 방식(창작 테크닉)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RPG는 작가와 독자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모형을 그대로 대입할 수 없습니다.


2. 보통은, 지각된 이야기가 상상한 이야기와 가까울수록 뛰어난 예술이라고 평가합니다. 예술 기법은 스토리를 어떻게 생생하고 명료하게 표현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론 이를 벗어날 이유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호러 소설의 테크닉 중 하나는 괴물을 직접 보여주기보다 암시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비록 작가가 구상한 것과 다를지라도, 독자는 자기에게 가장 무서운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3. 스토리는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건축물은 예술작품일 수 있지만, 시간에 따른 변화가 없다면 이는 스토리를 전해주진 못합니다. 따라서, 정적인 인물이나 배경은 그 자체만으론 스토리가 아닙니다.

 

4. 스토리는 매체 자체나 독자가 어떻게 매체를 접하느냐에 의해 영향 받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관의 의자가 정말 불편하다고 해도, 이는 관람 경험은 바꿀지언정 관객이 받아들이는 스토리 자체를 바꾸진 않습니다. 어떤 변화가 주어진 사건, 인물, 배경에 대한 관객의 관념을 바꿀 때에만 스토리에 영향을 미칩니다.


5. 지각된 이야기는 창작자나 창작 과정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러 갔을 때를 보죠. 저는 감독이 법률상 강간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 때문에 미국으로 도망쳐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영화에 대한 제 관점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단순한 방식으론 아니겠지만요). 하지만, 저는 이를 영화 스토리의 일부로 생각하진 않습니다. 달리 말해 이 정보는 제가 스토리로 지칭하는 심상의 밖에 있는 것입니다. 


6. 지각된 이야기는 주어진 인물, 배경, 사건에 대한 외부 지식에 영향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오래 전에 아이슬란드 영웅담을 읽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아이슬란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좀더 배우고 난 다음엔, 영웅담을 좀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지요. 담화(discourse)는 똑같았지만, 제가 지각한 이야기는 달라졌습니다.






RPG (Role-Playing Games)


“RPG”란 용어는 다양한 것을 지칭하는데 사용됩니다. 여기선 모든 RPG를 보편적으로 정의하려 하기보다 D&D, GURPS,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등으로 대표되는 “테이블탑 RPG” 유형으로만 논의를 좁혀두겠습니다. 이런 게임에선 한 명은 게임 마스터(GM)가 되고 각 플레이어는 상상 속 세상의 캐릭터 한 명씩을 맡습니다. 다른 종류의 RPG도 많지만, 이 유형이 다른 부류를 이해하는 데 예시이자 시험으로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에 전통적인 테이블탑 플레이의 구조를 나타내보았습니다. 아래 그림은 네 명의 플레이어와 GM 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줍니다. 



그림 2: 전형적 RPG에서의 상호작용


이 그림에는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먼저 각 참가자의 마음 속에 있는 스토리를 표시하는 상자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RPG에서 스토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논란이 있는 주제로, 그에 대한 답은 이후에 다루겠습니다. 그림에 있는 용어를 설명하자면,


게임 마스터 (GM)

마스터는 모든 참가자 중 공유 영역 밖에 있는 정보를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모형에서는, 마스터만이 다른 플레이어들의 캐릭터 제작에 관여하고 더불어 자기 만의 자료(자작, 혹은 상용 시나리오)를 갖고 있습니다.

 

플레이어 (Player)

각 플레이어는 각자의 캐릭터를 개인적 영역으로 갖습니다. 물론 캐릭터에 대해 공개된 정보도 있지만, 비공개된 정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캐릭터 시트에 쓰여진 것만이 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개인적 관념 모두를 포함합니다. 만약 모든 캐릭터 정보가 정말로 공유되었다면, 플레이어는 언제든지 아무 장애 없이 캐릭터를 주고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형에선, 플레이어와 캐릭터 간에 고유한 결속이 있다고 봅니다.


게임 텍스트 (Game Texts)

룰북이나 플레이어가 접할 수 있는 소스북 등 공개된 게임 텍스트입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게임세계 지도를 펼쳐두는 식으로, 직접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공유 영역과 직접 연결된 수직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참가자가 룰과 배경을 따로 익히는 일도 흔하고 직접 책을 펼쳐보는 일 없이 영향 받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캐릭터 제작에 관한 룰이 있습니다. 캐릭터는 각자 캐릭터를 만드는데 이 룰을 따릅니다. 따라서 게임 텍스트는 캐릭터 디자인에 영향을 미칩니다.


공유된 플레이 (Shared Play)

세션 중에 마스터와 플레이어가 주고 받는 공개 선언 및 의사소통입니다. 이 모형은 세션 동안, 마스터와 모든 플레이어가 같은 방 안에 앉아있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동작, 메모, 주사위 굴림, 카드 결과든, 모든 참가자가 볼 수만 있다면 여기에 포함됩니다.






간극 좁히기 Reconciling Differences


RPG와 소설 간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이 중 일부는 좀더 은근합니다. RPG가 작가와 독자 간의 구분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각 참가자가 표현도 하고 이해도 합니다. 나아가 이는 무엇이 스토리인가를 의문에 빠뜨립니다. 그 답은 우리가 RPG 플레이에서 담화 혹은 “텍스트”를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두 가지 해답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스토리는 공유된 플레이에 대한 참가자의 해석만을 포함합니다. 담화는 공유된 플레이(GM과 플레이어의 공개 대화)일 뿐,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RPG의 스토리는 정적인 서사의 “지각된 이야기”와 가장 가깝게 대응합니다.


2. 스토리는 참가자가 상상한 현실의 관념 전체입니다. 이 경우 담화는 게임 텍스트, 캐릭터 시트, GM 노트를 포함한 플레이의 모든 요소가 됩니다. 이 관점에서 RPG의 스토리는 정적인 서사의 “상상한 이야기”와 가장 가깝게 대응합니다. 


첫번째 관점은 정적 서사 형태에 보다 가깝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플레이는 시간을 따라 진행되고, 여러 화자가 서로 오가며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엔 플레이의 다른 요소에는 대응되는 것이 없습니다. 두번째 관점은 플레이의 다른 요소를 포함하지만, 전통적인 서사구조 모형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플레이는 여러 요소로 구성된 다중 미디어 체험이 되고 각 참가자는 진행되는 사건에 대해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질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답은 서사적인 맥락에서 RPG가 무엇인지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또 다른 패러다임도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인 서사 이론에서처럼 그것들도 이 두 가지 기본 관점에서 파생되리라 봅니다. 보다 복잡한 패러다임을 고안하는 것도 이후에 흥미롭게 살펴볼만한 분야입니다. 두 가지 기본 패러다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공동 이야기 창작으로서의 RPG (RPGs as Collaborative Storytelling)

2. 가상체험으로서의 RPG (RPGs as Virtual Experience)


두 패러다임 모두 RPG를 (RPG와는 다른) 전통적 서사에 견주어보는 데 기반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 서사의 직관적인 개념와 형식 이론을 접목하는 것 역시 필수적인 일입니다. 분석을 시작할 기반 없이는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 힘드니까요. 각각의 패러다임에 대해 서사적인 분석을 살펴보겠습니다.






공동 이야기 창작 (Collaborative Storytelling)


이 패러다임은 RPG 플레이를 여러 작가가 하나의 담화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 담화(공유된 플레이)는 플레이의 산물로, 소설이나 영화와 비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롤플레잉의 핵심은 공유된 담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림의 나머지 모든 요소(게임 텍스트, GM 노트, 캐릭터)는 플레이의 진짜 산물을 만들기 위한 보조도구일 뿐입니다. 


이는 RPG가 서사적 분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보드게임과 같은 이전의 게임과 비교해 혁신적인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주제”(theme)는 보드게임이나 비디오 게임에 적용하기엔 모호한 용어지만, 서사적 담화에 대해선 분명한 의미를 갖고 쓰입니다. 궁극적으로, 스토리텔링 게임은 (1) 만족스런 담화를 만들어내고, (2) 모든 참가자가 그 담화에 유의미하게 기여할 때, 성공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요소(노트, 캐릭터 시트, 텍스트)는 플레이 밖의 것으로 취급합니다. 이들은 만족스런 담화를 만드는 걸 도울 뿐이고, 그럴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을 배제하는 게 낫습니다. 


이 패러다임에는 다음과 같은 결론들이 따라옵니다.


- 참가자 간의 비밀을 지양합니다. 한 플레이어 혹은 GM과 한 명의 플레이어만 가진 비밀은 진짜 창작물(스토리)의 일부로 보지 않습니다.


- 게임 텍스트가 방대한 정보를 갖는 걸 지양합니다. 이들은 진짜 창작물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때때로 플레이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 게임 텍스트나 시나리오 노트를 참고하기보다 즉흥으로 만드는 것을 장려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 추리극 플레이에서, 플레이어는 GM이 시나리오에서 계획한 걸 밝혀내기보다, 현장에서 살인범의 정체를 터놓고 지어낼 수 있습니다. 


- 참가자 간의 창작권한을 동등하게 배분하는 것을 장려합니다. 플레이는 참가자 간에 서술권을 주고받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술을 주로 GM이 도맡는다면, 이를 결점으로 봅니다.


- 플레이어와 캐릭터 간의 연결은 임의적이고 플레이 체험에 핵심적인 게 아닙니다. 즉, 플레이어가 플롯 포인트를 쓰거나 사실 선언 등을 통해 다양한 캐릭터 밖 액션을 취하는 것을 장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룰 시스템은 의미 있는 산물 밖의 것으로 봅니다. 룰은 그 결과를 공유된 플레이에 반영하는 것으로 판가름할 뿐, 참가자가 플레이 과정을 어떻게 보느냐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 핵심적으로, 이 패러다임은 공유된 플레이를 소설이나 영화 같은 담화 그 자체로 보는데 기반하고 있습니다. 플레이는 당신이 즐길만한 것과 같은 스토리를 만드는 기쁨에서 재미를 얻는 것입니다. 플레이의 핵심은 자발적인 표현, 즉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의미를 개인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대개 능동적인 창작에 이은 부수적인 것으로 봅니다.

 





가상체험 (Virtual Experience)


이 패러다임에서 플레이는, 플레이어가 자기 시점의 캐릭터를 만들고 GM은 그 주변을 맡아 가상의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봅니다. 플레이의 기본 요소는 캐릭터와 세상입니다. 이 것들은 공유 플레이 세션에 앞서 구상되고, 따로 정리된 자료와 이들이 어떻게 작용할 지의 마음 속 모형 양쪽을 포함합니다. 플레이를 통해, 참가자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둔 것을 탐사하고 자신의 창작물을 더 발전시킵니다. 


따라서 담화(discourse)은 각 참가자마다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GM은 배경과 주변 인물에 대한 설정을 갖고 플레이를 시작합니다. 이들은 GM이 세상에 대해 상상한 내용 일부를 나타냅니다. GM의 담화는 이 설정 내용을 포함하고, 따라서 스토리(GM 마음 속의 구상물)엔 이들이 포함됩니다. 플레이어들은 이런 내용을 보지 못하고, 따라서 플레이어 마음 속의 스토리는 공유된 플레이에서 밝혀진 내용만을 포함합니다. 각 플레이어도 자기 PC가 주인공이거나 최소한 관찰자 캐릭터인 채로 제각기 다른 스토리를 체험합니다.


뿐만 아니라, 게임 텍스트와 룰 자체도 담화의 일부가 됩니다. 예를 들어, 세션 중에 총이 한번도 발사되지 않더라도 총에 관한 룰은 스토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픽션 세상 속에서 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룰 상으로 총기가 모두 극히 치명적이라면, 설령 총이 발사되는 일이 전혀 없더라도 총이 등장하는 장면의 긴장감이 높아질 것입니다.


대부분의 게임 요소는 픽션 속 세상의 무언가를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캐릭터 시트의 힘 수치는 캐릭터의 한 일면을 나타냅니다. 플레이 속 세상을 반영하지 않는 요소는 “메타 게임”으로 지칭됩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아무 주사위 굴림이나 바꾸는 데 쓸 수 있는 드라마 포인트가 있다고 칩시다. 이는 게임 속에서 캐릭터의 어떤 특성도 나타내지 않으므로 메타 게임 요소입니다. 이는 마치 영화 속에서 캐릭터가 카메라에 대고 이야기를 하거나, 뻔히 달라보이는 스턴트맨을 대역으로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카메라 움직임이나 극적인 음악 같은 영화요소는 좀더 미묘합니다. 어떤 경우, 이는 캐릭터의 내적인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순전히 관객을 향한 것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 패러다임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따라옵니다.


-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연결은 (가상)체험에 핵심적입니다. 따라서 캐릭터 밖 행동이나 메타게임 판단은 다른 면에서 유용하더라도 최소화되어야 합니다. 


- 플레이어-캐릭터 간의 일대일 대응을 지향합니다. 오직 한 사람(GM)만이 다른 캐릭터를 맡는 플레이일 때 이 패러다임에 가까워집니다.


- 게임 텍스트의 세부적인 배경설정을 장려합니다 (디테일이 너무 많은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요). 플레이어는 이를 플레이의 일부로 참고할 수 있고, 보다 중요한 점은 배경이 플레이 전체를 꾸미는 맥락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 캐릭터가 모를 법한 것은 플레이어도 모르는 쪽을 장려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상적인 것은, 플레이어가 모두 제각기 다른 양의 정보를 접하는 라이브 액션 플레이입니다. 하지만 라이브 액션엔 다른 큰 제약도 많아 이상적이지만은 않습니다.


- 플레이어가 각기 캐릭터의 생각을 심사숙고하는 것을 장려합니다. 캐릭터에 내적인 생명을 부여하며, 더불어 플레이어 체험의 일부가 됩니다.


- 룰이 픽션 속의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것, 즉 메타 게임보다 게임 내적인 쪽을 장려합니다. 독백이나 영화 속 카메라 시점 같이, 메타 게임 룰은 좋은 도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메타 게임 룰은 사용을 삼가야 합니다.


이 패러다임은 서사를, 어떤 면에서 소설이나 영화보다 박물관 전시물 같이, 몰입적 상연물로 봅니다. 플레이어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다양한 시점을 갖습니다. 대화, 책의 본문, 캐릭터시트, 지도, 주사위 굴림 등으로요. 이 모든 것이 스토리의 일부가 됩니다. 책이나 지도 같은 정적인 요소가 이야기의 일부로 인식되므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좀더 초점이 맞춰집니다. 플레이의 핵심은 이 모든 요소가 플레이어의 마음 속에서 결합되는 데, 즉, 픽션 속 현실을 생생한 심상으로 상상하는데 있습니다. 롤플레이는 자기 캐릭터의 내면으로 떠나는 개인적 여행으로 볼 수 있습니다. 






패러다임 충돌 Paradigm Clash


서사를 이해하고 창조하는 방식에 대한 불일치로 인해, 플레이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RPG를 공동 이야기 창작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를 가상체험으로 이해하는 참가자와 논쟁이 붙을 수 있습니다.


스토리텔링 관점에서 보면, 가상체험 관점은 가능한 기법의 범위를 쓸데없이 제한시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스토리(공유된 플레이)를 더 낫게 만들 기회를, 그저 미리 정해진 룰이나 배경설정을 따르기 위해 놓칠 수 있으니까요. 스토리텔링 유형은 이런 룰이나 설정을 스토리의 일부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재미가 덜한 스토리를 고르는 듯한 이런 행동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체험적 플레이는 사건을 능동적으로 조종하기보다 일어나도록 냅두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픽션 속 서사는 여전히 만들어지므로 이런 시각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차이는 어떤 유형의 서사가 만들어지느냐입니다.


가상체험 관점에서 보면, 스토리텔링 플레이는 있지도 않은 독자를 위한 창작물을 만드는 걸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창작물은 누군가 공유된 플레이를 보는 사람의 스토리지, 주변환경의 체험이 아니라는 거지요. 또한 스토리텔링은 미리 정해진 룰이나 설정을 자유롭게 바꾸거나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체험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반할 수 있습니다. 체험적 플레이어는 스토리텔링식 플레이에서 불일치나 깊이 부족 때문에 긴박감이 깨진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의 두 가지 다른 정의를 동시에 보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해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같은 RPG 플레이를 해도 두 사람은 이를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고, 자신이 “스토리”라고 생각하는 식으로 심상 모형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구별에 대한 설명이 이런 차이를 판별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남은 질문들 Further Questions


제 분석에는 아직 많은 질문들이 남아 있습니다. 먼저 여기 나온 두 가지 패러다임 외의 다른 패러다임 혹은 이 둘의 하위분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장르, 플롯, 캐릭터와 같은 다른 서사 개념을 RPG에 어떻게 연결시킬지 하는 질문도 있습니다. 더불어 여기서는 전통적 서사에 대해, 또 RPG에 관해 일부러 좁은 범위의 개념을 택했습니다. 연극 무대, 특히 즉흥극은 정적 서사보다 RPG에 보다 흡사할 것입니다. 또한 1인용 RPG, 컴퓨터 RPG 게임, 다른 구조의 RPG(GM이 없는 등) 등 다른 롤플레잉 형태는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하는 질문도 남아있습니다.




[1]  Wallace Martin, "Recent Theories of Narrative". 1986.

[2]  Liz Henry, "Power, Information, and Play in Role Playing Games." http://www.darkshire.net/~jhkim/rpg/theory/liz-paper-2003/

[3]  The Forge: www.indie-rpgs.com

[4]  rec.games.frp.advoca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