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PG 연구실

RPG 캐릭터의 성장을 다루는 방식: D&D식 레벨업과 다른 대안들.

by 애스디


이 글에선 D&D식 레벨업 시스템이 캐릭터의 성장을 다루는 방식과 장편 캠페인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레벨업이 없는 RPG 시스템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려고 하고요. D&D식 레벨업 시스템이 플레이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는 점이 주제가 되겠습니다.



 

1. D&D식 레벨업 시스템과 그 파급효과.


최초의 TRPG인 D&D는 전통적으로 레벨업을 통한 캐릭터의 성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D&D식 레벨업 시스템은 자연스레 "처음엔 보잘것 없던 초보 모험가가 동료들과 함께 수많은 모험을 거치며 점점 강해져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된다"는 서사를 지원하게 됩니다. 딱 이러한 식의 판타지/무협 풍의 영웅 서사를 만들기 위해 짜여진 캐릭터 성장 시스템인 셈이지요. 레벨업에 따라 점점 강력한 능력을 더해가고 더 강한 적을 상대함으로써, 캐릭터의 파워업을 체감하게 하는데 치중하고 있습니다. 


D&D식 RPG가 다루는 캐릭터의 성장은 '레벨업'으로 함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웅=고레벨 캐릭터인 셈이고, 고레벨 캐릭터가 갖는 힘과 능력이 영웅의 징표인 셈입니다. 그만큼 배경세계 속에서 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세상을 구하는 업적을 세울 수도 있게 되니까요. D&D식 장편 캠페인에선 이렇게 캐릭터의 활동무대가 지역-국가-세계-타차원 식으로 확장되는 경우도 흔합니다. 


한편 이러한 시스템은 은연 중에 "레벨업해서 더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레벨업을 하고 좋은 아이템을 얻을 때마다 캐릭터가 강해지는 게 확연히 느껴지고, 그게 큰 보상으로 작용하니까요. MMORPG 등의 컴퓨터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동기를 자극하는 것도 이런 요소죠. TRPG 플레이에서도 캐릭터가 더 강해지기 위해 경험치를 따지고 마법물품에 연연하고 파워빌딩을 추구하는 경우가 흔히 생깁니다. 어쩌면 D&D는 "캐릭터의 파워업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강해진 힘을 전투에서 입증하는 것"을 플레이의 주 동력 중 하나로 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MMORPG처럼 대놓고 만렙이나 장비 파밍을 추구하는 건 아니더라도요.




2. 레벨업이 없는 TRPG: 캐릭터 성장의 다양한 가능성.


D&D 이후에 나온 다양한 RPG들도 제각기 플레이에 따라 캐릭터가 성장하는 룰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RPG에선 레벨업 시스템을 따르지 않고, 그에 따라 캐릭터의 성장도 꼭 선형적인 파워업이라기보다 '이야기에 따른 캐릭터의 변화'에 가까운 양상을 보입니다. 플레이어들도 캐릭터의 성장, 강화에 집착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요.


예를 들어 GURPS나 페이트 같은 시스템의 경우, 훨씬 점진적인 형태로 캐릭터의 성장을 다룹니다. D&D에서 1레벨 캐릭터와 5레벨 캐릭터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이런 시스템에선 오히려 캐릭터의 연속성이 훨씬 강조됩니다. 캐릭터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장편 플레이 속에서 벌어진 일들, 그에 따라 축적된 변화가 캐릭터의 성장으로 반영되는 것이죠. 


WOD나 크툴루의 부름, 폴라리스 같은 RPG에선, 캐릭터의 성장 뿐만 아니라 약화/타락도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비극적 서사를 추구하는 만큼 캐릭터가 강해지는 것보다, 일면 흔들리고 약해지거나 변모해가는 것이 훨씬 강조되는 것입니다. 이런 RPG에서 D&D식의 성장과 파워업을 추구하는 건 말도 안되는 짓이겠지요.


이렇게 레벨업 시스템이 없다는 것만으로, 각 TRPG 시스템이 지향하는 '캐릭터의 성장'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D&D식 클래스/레벨 시스템은, 각 클래스에 따라 고정된 형태로 캐릭터가 성장해가며 시스템이 예비해둔 영웅의 전형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캐릭터 정체성의 큰 부분을 '클래스'로서 시스템이 제공하고, 플레이어는 약간의 개성을 얹는 식인지도 모릅니다. 




3. 레벨업 시스템의 완화: 던전월드, 누메네라, 13시대.


마지막으로 D&D와 비슷하게 레벨업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지만, D&D식 파워업이 덜 강조되는 RPG 시스템을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던전월드, 누메네라, 13시대가 그 사례입니다. 


던전월드 같은 경우, 레벨업에 따른 차이가 D&D보다 훨씬 적은 편입니다. 열심히 목메고 레벨업을 추구해봤자 강해지는 폭은 작습니다. 레벨에 따라 상대할 괴물이 꼭 정해져 있지도 않고요. 수치 상의 파워업으로 캐릭터를 표현하는 룰이 아니니까요. 누메네라의 경우도 사이퍼나 아티팩트의 활용도가 높아 캐릭터 파워업에 크게 연연할 일이 덜하고요. 


이들 시스템에선 1레벨부터 특별한 존재로서 캐릭터의 위상이 높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13시대의 경우 1레벨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표상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고 유일무이한 특징을 갖추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던전월드나 13시대, 누메네라 캐릭터는 1레벨부터 세상을 구해내는 커다란 모험에 뛰어들도록 룰북이 장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캐릭터의 파워업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곧바로 세상에 일어나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그걸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전투 외의 서사적 해법/수단을 강조한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이런 시스템에서도 레벨업 시스템이 갖는 기본 목적은, 캐릭터가 영웅으로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기 위한 것이라고 봐요. 대신 레벨업 시스템의 역할을 축소하고 저레벨 때부터 이야기 속에서 캐릭터의 활약과 업적을 강조하는 쪽이라 봅니다.




* 맺음말


D&D식 레벨업 시스템은 매우 친숙하지만, 의외로 그 여부에 따라 RPG 시스템의 방향성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입니다. 레벨업 체계가 있냐 없냐에 따라 RPG 시스템을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요. 각 TRPG 룰의 지향점과 특색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