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TRPG 마이너 갤러리에서 이런 얘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던전월드]나 [13시대] 같은 요즘 룰은 '실패해도 전진하라'는 철학을 갖고 있는데... 그래도 문 열기 판정에 실패했으니 오우거가 튀어나와 공격한다!는 건 어색하지 않냐? 문 열기에 실패했다고 왜 없던 오우거가 소환돼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이 의문은 룰의 기능에 있어 플레이 속 세계를 모사(simulation)하는 역할(모사주의)과 극적인 흐름을 만들어내는 역할(서사주의)의 충돌로 볼 수 있습니다. 아래에선 RPG가 발달하면서 판정 룰의 쓰임새와 역할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변해왔나 살펴보려 합니다. (참고: RPG 플레이의 세 가지 경향(GSD 삼단모델))
1. 현실의 시뮬레이션으로서의 룰과 그 문제.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RPG인 D&D는 워게임에서 탄생했습니다. 자연히 전투에 관련해 성공/실패를 가리는 룰을 가져왔고, 이는 게임 상의 확률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플레이 속 세계"를 모사하는 역할도 갖게 되었습니다. 점차 전투 외의 영역에도 능력치 판정이나 기능 판정 식으로 성공/실패를 도입하게 된 거고요. 이렇게 판정 룰은 플레이 속 세계를 현실감 있게 표현하고, 캐릭터 간의 능력 차이를 반영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룰이 없는' 플레이는 좀 별로라고 봅니다)
근데 문제는 전투 외 장면의 행동 판정은 실패하면 진행이 막히는 경우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이런 경우에 고전적 마스터링(예: 바바 히데카즈의 마스터링 강좌)에선 다른 방식으로 재시도 기회를 여러번 줘서 어떻게든 성공을 만들게 했지요. 절벽에서 떨어지면 모퉁이를 잡을 찬스를 주고, 안되면 동료가 붙잡는 판정을 시키고, 안되면 또 뭔가 식으로요. 결정적 단서를 못 얻었으면 다른 장소나 NPC를 통해 얻게 한다든지, 아예 마스터가 NPC 동원해서 강제 진행하는 경우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그러다보니 성공/실패를 꼭 가릴 때가 아니면 판정을 시키지 말자는 논리가 나왔습니다. 진행상 꼭 성공해야할 상황이면 그냥 넘어가란 거지요. 관점에 따라 어떤 때는 룰을 쓰고 어떤 때는 안쓰니 일관성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요. 이게 발전해서 인디 RPG 쪽에선, 아예 극적인 전개상 중요한 것만 "대결"(conflict)로 처리해서 승부를 보고 나머지는 이야기 진행에 필요한 대로 넘기자 라고 하게 됐습니다. 포도원의 파수견의 "Say yes or Roll dice"가 이런 뜻입니다.
2. 극적 흐름을 낳는 장치로서의 룰.
이런 식의 인디 RPG에선 판정의 역할이 원래 "플레이 속 세계를 모사하는 것"에서 "극적인 흐름의 분기/변화를 만드는 것"으로 바뀌게 됐습니다. 즉 TRPG에서 판정은 RPG를 게임으로 만들거나 현실의 시뮬레이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플레이 진행 가운데 변수를 낳기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판정을 보면, 판정 자체가 현실을 세세하게 모사하는 것보다, 그에 따라 이후의 전개가 어떻게 달라지냐가 더 중요해집니다. "실패해도 전진하라"(13시대)는 판정 결과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새로운 전개를 만드는데 쓰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문을 부수는데 실패했어요? 그럼 문 뒤의 오우거가 갑자기 뛰쳐나와 기습해요!"가 가능한 거지요.
기존의 모사주의 입장에서 보면, 문 부수는 판정에 실패했는데 없던 오우거가 생겨난다고 어색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것도 조금 생각하면 나름대로 논리를 지어낼 수 있습니다. 마침 문 뒤에 괴물들이 잠복하고 있었고, 문을 부수는데 성공하면 PC들이 기습에 성공했겠지만, 한번에 못 부수면서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적들이 알아채고 튀어나온 거라든가... 게임주의 방식에선 이걸 미리 시나리오에 짜놓고 운영하지만, 서사주의 방식에선 그냥 판정 성공/실패를 창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이런 전개를 '사후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러면 판정이 어떻든 상황이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니까 진행이 막힐 이유가 없고요.
3. 맺음말
저는 TRPG에서 판정 룰이 갖는 의미가 이런 식으로 변화해왔다고 보지만... 어떤 입장을 취할 지는 각 팀의 취향과 선택이겠지요. 맨 처음의 예시로 돌아가면, 게임주의/모사주의에 따라 "문 열기 판정 실패지요? 문이 안 열립니다." 라고 끝내버리면 재미도 없고 경우에 따라 진행 자체가 막힐 수 있다는 게 문제겠고요. 이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판정의 실패를 창의적으로 해석, 적용하는 방식이 나왔다고 보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