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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연구실

RPG의 구조와 "의미 있는 선택"

by 애스디


전에 Session에 올렸던 글인데, 이번에 [게임주의 플레이와 게이머 시점] 글을 쓰면서 같이 올립니다. 참가자가 플레이 속 상황에 비추어 의미있는 선택을 내리려면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분석입니다. 이론적인 내용이고 분량이 길지만, 읽어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을 거에요^^






0. 서론



  성일님이 [RPG 연구실 10a: RPG의 기본 단위]에서 다음과 같이 RPG 플레이의 기본 단위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http://www.rpg-session.net/bbs/3879 참조)


  1) 문제 - 2) 선택 - 3) 판단기준 - 4) 구현


  원 글에서 '1) 문제'는 RPG 플레이 내에서 캐릭터가 맞닥뜨리는 문제상황(인카운터?) 뿐만 아니라, 플레이 외적으로 참가자들이 고려해야 할 요소("이 장면은 빠르고 화려하게", "이 악당 NPC는 멋있게 죽도록..." 등)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플레이어가 '캐릭터 시점'으로 마주치는 문제/선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이 글은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통해 플레이 내에서 행하는 선택이 중시되는 플레이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RPG에서 일반적으로 플레이어는 주인공 격인 '하나의 인물'(PC, player character)을 맡고, 마스터는 PC 외의 모든 다른 인물과 배경을 맡습니다. 위의 구조를 비춰보면, 주로 마스터가 1) 문제 상황을 제시하고, 플레이어가 PC의 행동을 2) 선택하고, 이 것이 룰북 등의 3) 판단기준을 통해 처리되어, 4) 구현됩니다.


  저는 여기서 각 단계에서 고려해야 할 요소, 특히 플레이어가 '의미 있는 선택'을 하기 위해 어떤 점들이 고려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결과적으로 플레이어가 취하는 선택은, 3) 판단기준 과 4) 구현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긴 글이 되겠지만, 가능한한 제 능력이 닿는대로 충분히 폭넓고 깊이있는 분석을 시도해보겠습니다.




1. 문제: 마스터의 상황 제시


  1) 마스터 주도 vs. 합의 중심


  던전모험물에서 파생된 전통적 구도에서, 문제 상황을 제시하는 것은 늘 마스터의 몫입니다. 마스터가 절대적/독단적/임의적 권한을 갖고 있기에, 결과적으로 '적절한 문제'를 제시하는 것은 오직 마스터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흥미로운 '문제 상황'을 늘 제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플레이어가 어떤 상황/문제를 선호할지 짐작하고, 룰 측면에서 밸런스 등을 검토해야 합니다. 숙고를 거듭해 내놓은 문제도 플레이어들은 전혀 다르게 반응해 꼬이는 경우도 적잖습니다. 


  한가지 방법은, 사전에 플레이에 나올만한 흥미로운 문제/갈등 거리들을 논의하는 것입니다. 캠페인 논의에서 직접적으로 이뤄질 수도 있고, 사실 캐릭터 메이킹 과정에서도 간접적으로 이뤄집니다. 잘 만들어진 RPG 캐릭터는 나름의 갈등 거리, 캐릭터가 주목하는 관심사들을 안고 있고, 이런 것들이 플레이에서 활용될 수 있지요. [안방극장 대모험 (Primetime adventure)] 같은 인디 RPG는, 이런 캐릭터 의 갈등거리를 미리 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플레이할 수 있게 지원하기도 합니다. D&D 같은 경우는, '서로 다른 능력/역할을 지닌 캐릭터들이 협동해서 던전을 돌파한다'는 대전제를 갖고 있는 경우고요. 이렇게 시스템 자체에서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이 제시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이드라인과 뒷받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문제를 내놓는 주도권은 여전히 마스터에게 있습니다. '합의에 근간한 플레이'(RPG 연구실 12 참조)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다 적극적, 직접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정보의 불균형.


  앞서 전제한 대로 마스터가 PC 외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체제는, 결과적으로 정보의 불균형을 낳습니다. 마스터가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실상'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마스터 주도의 전통적 구도에서 플레이어가 헤매는 이유도 대부분 이런 정보의 부족과 오해 때문입니다.


  특히 개개인의 사전 지식, 관점에 따라 같은 내용을 전달했더라도, 전혀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마스터가 아무리 노력해도 플레이어는 머릿 속에서 마스터와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 이 점이 반드시 나쁜 것 만은 아닙니다. 그런 인식 차이 때문에, 마스터가 예상치 못한 독창적인 접근을 꾀할 수 있는 면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동상이몽'이 플레이에 장애가 되는 일도 많지요. 기존에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크게 1) 모두가 이해/공감하기 쉬운 대중적 장르 규칙 활용, 2) 비슷한 사전지식/경험을 공유하는 팀원들과 장기간 호흡을 맞추며 조율 하는 것이었습니다.


  1)과도 상통하는 내용이지만, 이 부분에서도 권한의 분배, "마스터->플레이어로의 일방적 소통 에서 쌍방향 의사소통으로 전환"을 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마스터가 독단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나 팀이 함께 정하게 할 수 있습니다. [Burning Empires] 등 몇몇 최근 RPG 중에선 ~~지식 계통 능력을 가진 PC가 판정을 통해 '실제로 ~~가 이 세계에 있다' 라고 규정할 수 있는 시스템들이 있습니다. [Shock: Social Science Fiction] 같은 경우도, 모든 플레이어에게 세계의 제반 분야(경제, 군사, 정치, 과학기술 등)를 나눠 각각의 설정을 총괄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고요. '합의에 근간한 플레이'에서도 이러한 정보/설정 권한의 공유가 핵심일 터입니다.



* 개인적으로 저는 '합의에 의한 플레이'가 '마스터 주도형'에 대한 대안이긴 하지만, 그것이 늘 우월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보 불균형에 따라 플레이 양상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는, John H. Kim의 [Story and Narrative Paradigms in Role-Playing Games]에서 깊이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한번 참고해보시면 좋을 거라 생각돼요.




2. 선택: "의미 있는 선택"의 전제조건.


  자. 이제 마스터가 문제 상황을 제시했습니다. 이젠 플레이어가 이에 대응해 PC가 취할 행동을 정할 차례죠. 그런데, 이렇게 문제 상황이 주어지고, 플레이어가 뭔가 선택할 자유가 있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일까요? 왜 우리는 때로는 너무 '자유도'가 부족하다고, 때로는 너무 자유도가 넓다고 하소연하는 걸까요.


  플레이어의 선택이 "의미 있는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이 성립해야 합니다.



  1) 실질적 선택의 자유: 어느 쪽이든 플레이가 가능해야 한다. (대안이 없거나 뻔한 선택은 부적절)

  선택지가 주어지긴 하지만 실제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쪽으로 가면 그 다음 전개가 불가능하다던가요. 이건 사실상 선택이 아닙니다. 마치 '자유도가 있는 듯한' 외길 진행이겠죠. 마찬가지로 실제로 양쪽 다 진행 가능하더라도, 한쪽이 명백히 유리한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뻔히 불리한). 이렇게 뻔한 선택 역시 실질적으로 선택이라 부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선택이 모조리 '없어져야'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야기 진행과 상황 상, 달리 운신의 폭이 없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문학/엔터테인먼트 작품의 스토리가 그렇고요. 하지만 플레이어가 PC의 선택을 통해 주로 플레이에 관여하는 플레이라면, 이런 '명목상의 선택'만으로 시나리오 전체가 채워져선 안됩니다. 마스터의 일방적 소설 쓰기에 따라 플레이어들이 연기 놀음을 하는데 지나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잘 포장하더라도, 결국 이런 플레이엔 염증을 내고 질려버릴 터입니다.



  2) 영향력 있는 선택: 선택에 따라 플레이에 미치는 영향이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PC들은 중요한 편지를 수도에 전달해야 합니다. 가는 길은 산을 넘는 육로와 강을 오르는 뱃길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길을 택하든 PC는 별일 없이 수도에 열흘 만에 도착한다고 해보죠. 이 선택은 의미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어느 길을 가든지 똑같은 선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듯한' 겉포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선택은, 선택에 따라 플레이에 미치는 영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PC의 선택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A. 캐릭터 외부 세계에: 목표 달성에 가까워짐/멀어짐, 새로운 목표/갈등의 발생...

B. 캐릭터 자신에게: 손실/성장, 다른 인물과 관계 변화, 캐릭터의 내적 변화...

C. 참가자에게 (플레이어 또는 마스터)

  가장 직접적으로, 당면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흔한 경우로 전술적으로 옳은 판단을 하면, 이점을 얻는 것입니다. 주어진 문제가 외부세계에서 주어지는 도전/장해물일 때, 이러한 경우가 많을 듯 합니다. 또한 캐릭터 자신이 장기적으로 손해(부상, 아이템 손실, ...)를 입거나 사회적 관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드워프 동료: "뱃길로 가겠다면, 난 떠나겠네."). 더나아가 캐릭터 자신의 가치관과 인격이 변화될 수 있고요 (인물 내적 갈등의 진전). 제가 예전에 쓴 [RPG에서의 갈등](http://www.rpg-session.net/bbs/24625)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한편 'C. 참가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좀더 특이한 경우가 아닐까 싶어요. 대부분의 선택은 캐릭터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지만, 캐릭터는 여전히 변하는 점이 없지만 플레이어나 마스터가 영향을 받는 경우도 존재하지 않을까요. 도덕적 딜레마 등을 다룬 플레이에서 이런 가능성을 탐구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3) 근거 있는 선택: 플레이어가 판단을 내릴만한 기준(정보)이 있어야 한다.


  아까의 예로 돌아갑시다. "산으로 가면 산적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뱃길은 안전하다."라고 두 선택에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된 걸까요?


  아닙니다. 플레이어는 어느 선택이 유리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결과에 차등을 두었다면, 그런 선택을 할 근거, 필요한 정보도 제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각 선택을 했을 때 일어날 결과를 미루어 예측할 수 있는 근거(실마리)가 있어야 합니다. 정보도 없이 선택지를 내놓은 다음에, 잘못 골랐다고 괴롭히는 것은 마스터의 폭압일 뿐입니다.


  근데 이게 '1) 실질적 선택의 자유'와 맞물리면, 쉽지 않은 문제가 됩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선택이 뻔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크게 두 가지로 가능합니다. 첫째는 결과에 '불확실성(risk)'을 부여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득에 따르는 대가(trade-off)'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A. 불확실성 (Risk)


  사람들은 뻔히 손해를 볼 줄 알면서도 도박을 하고 복권을 삽니다. 이득을 볼 거라는 희망에 위험을 감수하는 거죠. 예를 들어 "산적을 만났다"라고 칩시다. 싸울까요, 아니면 통행료를 낼까요? 싸움을 택하는 게 위험한 건 틀림없지만, 그래도 이겨보자는 욕심과 스릴에 결과를 맡기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도둑 캐릭터가 빈집털이를 고민하는 장면을 생각해봅시다. 이 부잣집은 경비 수준이 얼마만할까요? 성공할 수 있을까요? 며칠간 집을 감시해보며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지만, '완전한 정보'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사위에 운명을 걸고 나아가는 겁니다.


B. 대가가 따르는 선택 (Trade-off)


  선택에 따라 이득과 그에 따르는 대가를 모두 감수해야 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육로로 가면 위험하지만 싸고, 수로로 가면 안전하지만 비싸다든가요. 사실 위의 불확실성도 trade-off 의 한 갈래로 볼 수 있습니다. '저위험 저수익(low risk, low return)' vs.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 이죠. 여러 trade-off가 가능하겠지만, 크게 '가치있는 것 vs. 가치있는 것'의 양자택일이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 이득과 손실(대가)이 결합된 딜레마('이 것을 얻기 위해 얼마만큼까지 대가를 치를 수 있는가')가 있을 것입니다. [Dogs in the Vineyard] 같은 RPG는 후자의 갈등을 시스템에서 지원하지요.


  대가가 따르는 선택(trade-off)의 매력은, 선택에 따라 결과가 확정된 경우에도 치열한 갈등이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내릴 행동에 대한 결과를 분명히 알면서도 거듭 고민할 수 밖에 없는... 뱃속 깊이 느껴지는 갈등이 될 수 있지요. :D



  4)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


  자. RPG에서 의미 있는 선택은, "실질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있고, 선택에 따른 결과가 차이나며, (플레이어가) 그를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제 귓가에 마스터들의 신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듯 합니다; 사실 저도 매번 저렇게 못했던 것 같아요. 묵념;;)


  여하튼 플레이어는 여러 선택지를 두고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 선택은, 크게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새 고등학교 사회 과목이 되었습...;).


A. 사실 판단: 같은 목표, 수단의 선택.


  사실 판단은 목표하는 결과는 같지만, 이를 이루는 여러 방법 중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즉,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고르는 전술적/이성적 추론이죠. 즉, 사실 판단은 플레이어의 지적 능력을 자극하고, 주어진 정보/단서들로부터 효과적인 전략을 택하는 행위가 됩니다. 따라서 사실 판단은 '(하나의) 정답'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찾기 어려울 따름이죠. (꼭 마스터가 미리 정답을 정해둔 '퍼즐'일 필요는 없습니다. 언제든 마스터가 생각지 못한 답이 나올 수도 있고, 룰 체계 내에서 정답이 자연스레 나올 수도 있고요.)


B. 가치 판단: 상충하는 목표 간의 선택.


  가치 판단은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충돌하는 목표(가치)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당연히 가치 판단에는 대부분 '정답이 없습니다'.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 어떤 가치를 더 우위에 놓느냐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지요.



  예전에 승한(Wishsong)님과 했던 무한세계 단편 플레이에서 예를 들어볼까 합니다(). PC들은 무한경비대 요원으로 무공이 실재하는 무협세계에서 '이차원의 비밀'이 노출되어, 이를 막으러 파견되었습니다. 활동 중에 만나 친분을 쌓은 NPC 당영기 노인이 문제의 동굴을 지키고 있었죠. 상대는 이쪽을 무공 비급을 노리는 사파로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당영기 노인과 '교섭'으로 설득해 문제를 풀지, 아니면 다짜고짜 기습으로 때려눕힐지 치열한 고민이 있었지요. 


  - 사실 판단: 교섭이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 가치 판단: 임무의 성공 vs. 현지인과의 관계 (인명 보호)


  이처럼 실제 플레이에선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이 서로 얽혀 한층 갈등을 더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 판단기준: 판정의 방법과 룰의 역할.



  1) 판정의 방법


  자. 플레이어가 선택을 내렸으면 이제 결과를 정할 차례입니다. 선택에 따른 결과를 정하는 데는 아래와 같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A. 마스터 임의 : 미리 정했을 수도 있고, 그때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일 수도 있습니다.

B. 배경세계(의 내적 법칙), 장르 규약.

C. 룰

D. (팀의) 합의.


  전통적 구도의 플레이라면, 대체로 A. 마스터 > B. 배경세계 > C. 룰 순의 권위도를 지닐 것 같습니다. 즉, 배경세계나 장르에 맞지 않는 룰은 조정/무시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필요에 따라 마스터가 배경세계나 룰을 다소 벗어난 판정을 내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스터는 '최종 심판자' 역할을 했었죠.


  어떤 방식을 취하든, 판정은 '일관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플레이어가 결과를 예상하고 의미있는 선택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만일 선택에 따른 결과가 다분히 임의적이고 그때그때 다르다면, 좀처럼 선택에 있어 기준을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플레이어로선 변덕스런 운명에 휘둘리는 무력감을 느끼게 되겠죠.

  

  한편, 합의에 따라 결과를 정하는 방식이라면('룰로 처리하자'고 합의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합의 과정 자체가 새로운 플레이 양식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일단 생략할게요. 다만, 결과가 상호 합의로 완전히 정해진 상황에도 '의미 있는 선택'은 가능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가가 따르는 선택(trade-off)'이라면 문제 없죠(동시에 가치 판단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폴라리스(Polaris)] 같은 RPG는, 주사위 등을 쓰지 않고 이런 참가자 간의 교섭('하지만 그러려면, ~~해야 할 것이다')으로 플레이가 이뤄지지요.



* 한편, 어느 방식으로 판정하든 간에, 어떤 측면에 주안점을 두고 판정하느냐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GSD 삼단 모델에서 제시된, '게임주의, 모사주의, 서사주의'가 이에 대한 고찰이 되겠습니다. (RPG 연구실 10a - RPG 플레이의 세 가지 경향 http://www.rpg-session.net/bbs/3880 참조.)



  2) 룰로써 판정하는 이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위의 네 가지 중 가장 흔히 쓰이는 것은 역시 '룰'에 의한 판정입니다. 룰로써 결과를 판정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습니다.


A. 객관적 불확실성 부여.

: 위에 설명한 대로 '결과가 어느 정도 가능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선택'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결과에 불확실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불확실성은 '예측가능한' 리스크(risk)여야 하고요. 룰은 이런 성공/실패의 가능성,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를 제공해, 불확실성이 있는 선택에서 플레이어가 참고할 기준이 됩니다. 


B. 사실성, 정합성 유지.

: 일관되게 룰을 적용함으로써, 배경세계의 사실성과 정합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세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감을 잡는데, 보다 객관적으로 계량된 정보를 얻을 수 있고요. ([대검] 14면 제법 베테랑 전사라 할만 하겠지.)


C. 권력의 객관성.

: 룰이라는 기준을 통해, 마스터가 임의로 결과를 정하는 것을 견제하는 측면도 있는 듯 합니다. 일종의 '페어 플레이'라고도 볼수 있는데(특히 D&D 3rd ~ 4th 쪽으로 오면서 이런 경향이 강화되는데), 그래도 마스터는 여전히 압도적인 우위를 갖고 있습니다. 일단 쓰려고 하면, 그런 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 언급합니다.


D. 의외의 전개 가능성.

: 주사위 등 확률에 맡김으로써 예상치 못한 전개를 낳을 수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성공, 실패로 전개가 뒤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죠. 저의 예전 플레이 경우도, 모두가 예기치 않게 NPC가 일격에 죽는 사태가 나오기도 했고요 (http://wishsong.egloos.com/3808677).



  결론적으로 줄여 말하면, 룰은 플레이어가 '의미있는 선택'을 하기 위한 기반입니다.(따라서 룰을 잘 알아야 합니다.) 특히 룰이 이를 지원하는 방식은 객관적이고 정량적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배경세계, 장르 규약, 마스터의 임의)에 비해 서로 '같은 그림'을 그리기가 훨씬 쉽다고 생각해요. 말로써 의사소통할 때 갖는 한계를 보완하고, 선택에 있어 행동 결과를 가늠하는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 룰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실 판정과 구현에 얽혀, '행동판정 vs. 갈등판정'(http://blog.storygames.kr/2127683), '실패해서는 안되는 판정의 역설'(http://blog.storygames.kr/2127715), '마스터는 룰에 어떻게,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는지', '플레이어의 RP는 판정에 어떻게, 얼마나 반영될 수 있는지', '플롯 포인트의 의의' 등 다룰 주제가 굉장히 많은데, 일단 여기선 플레이어의 '의미 있는 선택'과 관련해서 룰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으로 넘어가겠습니다.




4. 구현


  판정 기준이 있으면, 그에 따라 결과를 구현하는 것은 간단한(trivial)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보면 결과를 흥미롭게 정해두는 것이 RPG를 재미있게 하는 핵심 중 하나가 아닐까도 생각돼요. 이미 '의미있는 선택'이 되려면, 결과가 플레이에서 차이를 가져야 하고, 또한 이득에 대가가 따르는 trade-off가 있을 때가 흥미로운 플레이가 될 거라고 논의했죠.


  사실 전통적 플레이에서는, 플레이어가 PC의 행동을 결정하는 시점에선 선택에 따르는 결과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점에서 결과를 최소한 어느 정도 '예측가능해야 한다'는 건 위에서 논증했고요. [Dogs in the Vineyard]나 [Primetime adventure] 같은 여러 인디 룰에선, 아예 플레이어가 결과에 걸린 것(stake)을 미리 정해두고 선택(과 판정)을 하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룰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정확히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에 대해선 모호한 경우도 제법 있습니다. 전투 규칙 쪽은 피해/부상 룰이 명료한 반면, 다른 스킬 사용이나 교섭 등에선 대략적인 성공/실패의 정도만 나오지, 이를 어떻게 해석할 지는 팀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지요. D&D 4th의 스킬 챌린지도 이를 보다 명료하게 하려는 시도인지는 좀더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보통 스킬 챌린지에 걸려 있는 결과(stake)를 알려주고 들어가나요?)


  한편 결과를 구현하고 서술하는 것이 '마스터만의' 권한일 필요는 없습니다. [Story Engine]이나 [Primetime adventure] 등의 인디 룰에선 플레이어가 판정의 결과를 서술할 수 있게 하여, 좀더 능동적으로 이야기 전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열어두고 있지요. 이 부분도 여러모로 살펴볼 구석이 많을 것 같습니다. ^^;




5. 맺음말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솔직히 저도 뒷부분에 오니까 지쳐서 뭘 제대로 못 쓰겠네요. 허허;;) 일단 무엇보다도,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통해 '의미있는 선택'을 하기 위한 요건이 무엇인가...가 이 글의 핵심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1) 실질적으로 선택 가능한 대안들일 것: 너무 뻔하거나 일방적인 선택지는 선택지가 아님.

  2) 결과에 차이가 있는, 영향을 미치는 선택일 것.

  3) 판단을 내릴 적절한 기준이 있는 선택일 것: 사실 판단이든 가치 판단이든.


입니다. 문제 상황과 판정기준이나 결과의 구현 역시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저런 점들을 쭉 의식하면서 RPG를 플레이하진 않아요. 하지만 정말 제대로 RPG를 해보려고 한다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할 측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