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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링 강좌

자기도취형 마스터링의 폐해

by 애스디


원글은 2007년에 쓰여졌습니다 (Session 링크). 이때부터 어느 정도 문제의식을 갖고, 조금씩 마스터링 스타일을 바꾸게 된 것 같아요. 일단은 그 시절의 고백(?)을 그대로 옮겨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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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마스터링을 할 때 캠페인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하고, 몰입하는 스타일이에요. 저는 RPG외의 유희활동(게임, 애니, 영화 등)이 별로 없는 편이라 더욱 그렇죠. 특히 PC/콘솔 게임은 스타크래프트 이후로 거의 안했습니다. 오히려 장르 소설 등 책읽기를 많이 하는 편이죠.


거기에 RPG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제한되면서, RPG 플레이하는 기회가 너무 소중하게 됐어요. 정말로 꼭 표현해보고 싶은 아이디어와 주제의식을 갖고, RPG에 뛰어들고 기대수준도 굉장히 높죠. 그러다보니 제가 생각한 캠페인 분위기와 로망에 많이 집착하게 됐습니다. 천승민 님도 비슷한 이야길 하신 적이 있지만요. RPG에서 극적 완성도 높은 소설 같은 서사를 끌어내고 싶어하는 거죠. 플레이어들이 찡하게 감동하는. 



제가 그리는 RPG의 이상은, "마스터가 제시하는 [배경]과 [사건] 속에서 플레이어가 [인물]로서 체험하며, 그 안에 담긴 테마에 공감하고 갈등하고 자기 나름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마스터로서, 상황 가운데 어떤 주제의식을 던져주고('문제제기'?), 플레이어는 이를 캐릭터로서 겪고, 반응하고,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플레이 속에서 펼쳐내는 거죠. 사실 영화든, 만화든, 소설이든 모든 문학은, 나름대로 주제의식을 던지고 작가와 독자가 서로 교류하잖아요? RPG에선 참가자가 직접 플레이에 뛰어들어 [인물]로서 이에 대응하고, 마스터와 치열하게 서로의 철학이 부딪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어요.



문제는 정작 플레이어들은, 이런 데 별로 공감하고 따라와주지 않더란 겁니다. 기존의 RPG 스타일에선, 마스터의 권한이 워낙 막강하다보니까, 너무 일방적인 소통이 된 탓이죠. [인물], [사건], [배경] 중에서, 마스터는 [배경]과 [사건]을 주도하고, 플레이어는 [인물]을 통해서만 사건에 개입하니까요. 게다가 실상 마스터는 적잖은 NPC로 [인물]에까지 그 권력이 확장되어 있죠.


제가 이야기의 구조와 가능성을 너무 고정시키고, 자신의 로망에 너무 도취된 면이 있죠. 실제로도 보통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를 붙잡으면, 쉴새없이 머릿 속에서 온갖 구상이 떠오르고 자나깨나 곱씹곤 하거든요. 


그런데 정작 실제 플레이에선, 좀처럼 이런 이상이 충족되지 않는 겁니다. 나는 플레이에서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전달해보고 싶은데, 통 전해지지 않는 '벽'을 절감했죠. 플레이어들은 너무 PC 게임하듯이 퀘스트/문제해결 관점에서만 신경쓰고, 배후에 깔린 주제의식은 무시되는 것 같았습니다. 마스터는 플레이어들의 피드백과 리액션을 갈망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매번 캠페인에서 온갖 문제을 겪으며, 늘 실망스럽게 끝맺곤 했습니다.



1. 나홀로 분투와 인간적인 실망.


첫번째 반응은, 나름대로 어떻게든 플레이어들에게 '어필'하겠다고, 더욱더 기를 쓰고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배경세계와 캠페인 설명이 길어지고, 며칠씩 공들여 캐릭터 제작 가이드라인, 견본 캐릭터들을 올리곤 했죠. 플레이어들이 지난 흐름을 놓치지 않게 매주마다 몇 시간씩 리플레이를 정리하고 올리고... 


그럼에도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플레이어들의 행동을 접하면서, 점점 열의를 상실하고 좌절했죠. 난 이 플레이 하나에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데, 다른 플레이어들한테는 '이 캠페인이 얼마나 소중한 걸까?'라는 의문에 시달리고... 특히 플레이어들이 자꾸 빠지고 늦고 수동적인 태도(아래서 다시 언급할 거에요-)가 되풀이되면, '사람'한테 실망하게 되버렸던 것 같아요.



2. 마스터 독재의 심화와 플레이어 괴리.


이건 정말 안 좋은 건데, NPC를 동원해 점점 플레이를 직접 주도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PC가 겪는 갈등보다 NPC들의 갈등과 속사정이 부각되고, 플레이어들은 더더욱 플레이의 중심에서 멀어지죠. 마스터는 혼자 소설을 써대고 플레이어가 왜 몰라주나.. 하고 있고, 플레이어들은 나름대로 점점 소외 되어가는. 실제 플레이어분들이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그때 같이 이야기해보고 고쳐갔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3. 전투 비중의 증가와 캠페인 붕괴.


결국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공감대는 점점 줄어들고, 결국 전술적인 선택만이 남습니다. '전투'와 어떻게하면 상황을 유리하게 타개할까... 라는 쪽으로. '왜 그 길로 가야 하냐', '왜 그런 선택을 하는가' 하는 목적의식은 이미 오래 전에 상실. 플레이어들은 오직 전술적 결정(+ 일부 극적 장면의 수동적 감상)에만 재미를 얻고 관심을 보입니다. (덕분에 전투 운영 수완은 무척 늘었지만요;;) 비전투 캐릭터는 점점 소외되고, 마스터는 이번도 글렀구나...는 좌절감을 안고 결국엔 캠페인 붕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후회스런 부분이 많습니다. 주된 문제점은, "소통의 부족"과 "플레이어 참여 여지 부족"이었던 거 같아요. 기본 [배경]과 [사건]을 이미 제가 디자인해버렸기에, 참가자들에겐 자기 이야기로 와닿질 않는 거에요. 좀더 PC들로부터 유래되는 이야기를 했고, 깊숙히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구도의 디테일까지 통제하려는 욕심은 버리고, 플레이어들이 채울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둬야는 걸 깨달았어요. 



@ 이후에 얻은 해법에 관해선 [흐름을 타는 마스터링]을 참고해보세요. [포도원의 개들]에 나온 대로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준비하는 방식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