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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리뷰/활용

GURPS 전투의 사실성과 룰 활용법

by 애스디


"GURPS는 기본적으로 사실성을 강조합니다." (캠페인북 p.488)


GURPS는 세세하고 사실적인 규칙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특히 RPG에서 전투는 구체룰을 많이 사용하는 만큼, GURPS의 이런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는 부분이고요. 여기선 '사실적' 규칙을 사용하는 GURPS 전투의 특색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GURPS 전투가 너무 사실적이라고 불평한다면, 무엇 때문일까 라는 점이죠.


물론 범용 RPG인 만큼, 영화 같은 현실을 구현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기본세트와 서플리먼트에서 비사실적(cinematic) 플레이를 지원하는 방안을 많이 마련해두고 있죠 (기본 p. 417 "비사실적 전투 룰" 등 참조. [GURPS 헌터들의 밤] 등도 유용합니다). 아래에선 1) 사실적인 룰을 살려 플레이할 때 유의할 점과, 2) 룰을 극적인 현실에 맞게 고칠 때의 가이드라인을 살펴보았습니다.




1. 무장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GURPS는 장비의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보통 기능 판정도 장비가 없으면 -10 (혹은 -5)이라는 엄청난 페널티를 받습니다. 전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비무장한 캐릭터는 무장한 적에게 극히 불리합니다. 1) 방어 면에서 맨손은 무기 공격을 [받아내기] 힘들 뿐만 아니라 팔을 다칠 수 있고, 2) 맨손으로 공격하는 경우도 상대가 무기로 [받아내기]하면 부상을 입기 쉽니다. 붙잡기, 팔 굳히기 같은 그래플링 공격은 걸리면 강력하지만, 역시 무장한 적을 상대로는 위험이 따릅니다. 게다가 대미지도 무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무장을 한 경우도, 무장 수준에 따라 전투 능력이 크게 영향 받습니다. [하중]이나 돈의 제한이 있지만, 다른 조건이 같다면 거의 늘 중무장이 경무장보다 유리합니다. 브로드소드를 놔두고 단도를 선택할 이유는 없습니다. 기왕이면 DR 높은 갑옷이 킹왕짱입니다.


사실 그게 사실적이긴 합니다. 진짜 '전쟁', 싸움이라면 당연히 무장을 가능한한 단단히 갖춘 편이 유리합니다. 그런데 이게 극적 고려나 게임성과는 충돌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D&D 등에선 도적 클래스가 단도 등의 전용무기를 쓸 때 이점을 주어 무기의 차별성과 균형을 꾀합니다. 한편 극적/서사적 측면이 강조된 규칙에선 무장보다 캐릭터 고유능력이나 상황에 따라 대미지가 정해지기도 하고요. 그에 반해 GURPS는 현실을 반영하려는 '모사주의' 지향이죠.


제가 볼 때 장비의 영향력이 GURPS만큼 절대적인 룰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D&D 3판류의 매직 아이템 도배도 있지만, 그건 레벨에 따라 대개 평준화되니;). 특히 기술수준이 높아지고 총기와 하이테크 무기가 나오면... 더 말할 것도 없죠.


* 따라서 GURPS에서 무장 수준을 통제하는 요소는, 게임적 측면보다 배경세계의 사회 설정입니다. PC가 백주대낮에 시내에서 양손검을 휘두르지 않는 이유는, 경비병이 무장을 통제하기 때문이겠죠. 비번일 때 방탄복을 입고 다니지 않는 건 불편하기 때문이고요. 이런 점을 주지하고 [적법성]이나 관습, 현실적 불편함 등을 고려해야 할 터입니다. 어느 정도 무장 수준이 허용될지 의견이 일치해야겠죠.


** 무장에 좀 덜 영향받는 극적인 액션을 원한다면, '전투 중 분발'(p.356), '격투 에티켓'(p.417) 등의 옵션룰이나 다른 하우스룰(예: [고수의 제자]는 비무장 공격도 무장 공격인 것처럼 취급. 무협 캠페인용)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D&D의 암습 공격 같은 걸 표현하자면, 단도 등 일부 무기만 [부위 공격: 주요장기] 테크닉을 허용할 수도 있겠죠 ([GURPS 던전판타지] 참조).




2. 한 방에 승부가 기울기 쉽다.


D&D 등의 HP 시스템은 피해를 입어도 HP가 0 이상이면 행동에 지장이 없는 반면, GURPS는 쇼크 페널티, 녹다운, 불구 등 적잖은 위험이 따라옵니다.


특히 녹다운 당하면 무기를 놓치고 쓰러지는데, 다음 턴 끝에 HT 판정으로 바로 회복해도 그 다음 턴에 일어나 앉기, 다음 턴에 일어나며 떨어뜨린 무기를 집어들기까지 총 3턴을 "쉬어야" 합니다 (행동없음-자세변경-준비). 그동안 상대는 일어나려는 적(쓰러지거나 앉은 상태)을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고요.


또 다른 한 방의 가능성은 '불구'입니다. 부위별 공격 규칙을 쓰는 경우, 팔다리를 불구로 만들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훈련된 전투원이 무기를 갖추고 있다면 '한 방'으로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팔이든 다리든 하나만 잃어도 승부는 거의 끝납니다. 오른팔을 잃으면 공격을 못하고 다리를 잃으면 일어나질 못합니다. 게다가 중상이라 녹다운 판정까지 해야합니다! -2 페널티를 감수할 실력만 된다면, 몸통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 할 정도입니다. (단, [꿰기] 등은 팔다리에 피해 배수가 x1이라 좀 불리하죠;)


무기 실력은 훈련으로 쉽게 오르지만 맷집은 능력치(ST)에 기반한다는 점도 있습니다. 캐릭터가 성장할수록 실력이 성장해 더 효율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반면, HP는 보통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능동방어가 높아지면 공격을 받을 확률은 줄겠지만, 그래도 일단 뚫렸을 때 받는 타격은 여전히 치명적입니다. ST를 높여 HP가 늘어나면 좀 낫겠지만, 적도 같은 수준의 ST라면 파괴력도 늘어나니까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역시 나름 현실적이긴 합니다. 실제 싸움, 그것도 무기를 동원한 것이라면요. 하지만 경우에 따라 RPG에서 원하는 극적 현실과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운에 영향받을 수 있거든요. 어쩌다 나온 대성공/대실패 한 번에 전세가 확 기울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 따라서 GURPS 전투 규칙을 쓸 때는, 이렇게 한 방에 오락가락 할 수 있다는 "현실"을 감안해야 합니다. 약한 상대에게도 불운한 한 방에 쓰러질 수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 세상이라면 자신이 전투에 능해도 싸움을 벌이는데 훨씬 신중하겠죠. 한편, 이렇게 기선제압이 승리의 열쇠기 때문에 서로 신중한 견제와 공방이 이뤄진다면 그것도 나름의 재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기습"에 성공하면, 큰 이점을 얻을 수 있죠.


** 한 방에 승패가 망가지는 경우를 피하자면, [행운]("방어용", p.95)를 PC들에게 주거나 '스쳤을 뿐', 'TV 액션'(p.417) 등 비사실적 전투 룰을 쓸 수 있습니다. 팀에 따라 CP를 써서 판정 결과를 바꾸는 것을 허용할 수도 있고요(p. 347). 마스터 쪽에선 단번에 중상이 잘 나지 않게 대미지를 적당히 잡아두는 것도 방편입니다. 플레이어 입장에선 HT를 올리고 [고통에 강함] 등을 넣어서 쇼크나 녹다운 판정을 대비할 수 있습니다. 

  한편 팔다리 부위 공격이 남용된다면, 단번에 HP/2를 넘는 피해가 들어와야만 불구가 된다고 둘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게 기본이고 부위별 부상 누적(p.420)은 옵션이죠. 추가로 하우스룰로 이런 피해는 몸통에 입은 게 아니므로 전체 HP와는 상관없고, 쇼크 페널티만 줄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3. 머릿수의 영향이 크다.


GURPS의 능동방어는 [피하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회수가 제한됩니다. 그래서 일 대 다로 숫자가 밀리는 싸움은 크게 불리합니다. [받아내기]에 의존한다면 1:1, 방패를 쓰거나 이도류라면 1:2 정도가 상대하기 좋죠. 보통 여기에 후퇴+피하기로 한 명 정도 더 감당하는 게 한계입니다. (예외는 [피하기] 위주 캐릭터, 혹은 DR/맷집 위주 캐릭터 등)


뿐만 아니라 적의 숫자가 많아지면, 그 자체만으로 공격 대성공이 나오거나 한 번 정도 방어가 실패할 확률도 커집니다. 방향을 쓰는 전술 전투라면, 적 두 명이 서로 반대편에서 협공해 측방이나 후방을 치고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더불어 약한 공격이라도 여러 방 맞다보면 한 방쯤은 중상이 될 지도 모르죠.


역시 숫자는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적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RPG 플레이에서는 소수로 다수를 상대하는 극적인 장면을 원하는 경우가 많죠. 


* 룰에 손대지 않고 해결하려면, 적의 수가 많더라도 한번에 상대하는 수는 제한해두는 쪽이 좋습니다. 길목이 좁아서 한번에 들이칠 적의 수가 제한된다든가, 적이 간격을 두고 충원되어 차례로 격파해도 좋고요 ('전력의 축차적 투입'). 마스터가 배려해주지 않아도, 플레이어들이 이런 유인전술을 써먹어도 좋을 테고요.


** 룰 측면에서 보면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려면 실력 차가 크고 능동방어 실력이 높아야 합니다 (김성일님의 코멘트). [무기의 달인], [고수의 제자] 장점이나 '전투 중 분발'(p.356)을 쓰면 적 여럿을 상대로 연속공격이나 능동방어에 특히 도움이 됩니다. 더불어 빠른 진행을 위해선 적들의 공격이 약하고 PC들에게 쉽게 쓰러지는 게 좋습니다. '잔챙이'(p.417) 옵션 룰이 특히 유용합니다 ([GURPS 헌터들의 밤]이나 [던전판타지]에도 비슷한 룰이 있고요). 




전에 Session에 올렸던 글입니다. 이쪽의 덧글도 관심 있으면 살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