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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리뷰/활용

아포칼립스 월드 엔진(AWE)의 디자인 철학.


빈센트 베이커의 [아포칼립스 월드]는 [던전월드]를 비롯해 다양한 아포칼립스 월드 엔진(AWE) 룰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AWE가 다른 시스템과 다른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요? 여기선 제가 생각하는 AWE의 디자인 철학을 꼽아보려 합니다.




1. AWE의 핵심 강령: 플레이를 해서 어떻게 되는지 알아낸다.


[아포칼립스 월드]의 마스터 강령 3개 중 "이 세계를 사실감 있는 곳으로 만든다.", "캐릭터들의 삶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는 다른 RPG도 신경쓰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플레이를 해서 어떻게 되는지 알아낸다."는 AWE만의 차별점이지요.


"플레이를 해서 어떻게 되는지 알아낸다"는 것은 빈센트 베이커의 전작인 [포도원의 파수견]에서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포도원의 파수견]에서도 마스터는 여러 인물이 얽혀 일촉즉발 상태인 마을(무대)를 준비할 뿐, 이후 진행은 철저히 PC의 행동과 선택을 따라 일어나게 합니다 ([포도원의 파수견]의 마스터링 기법 #1#2 참조). 이렇게 고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플레이가 일어날 '무대'를 준비하는 것이 제작자 빈센트 베이커의 성향인 듯 합니다.


아포칼립스 월드의 MC는 플레이를 함으로써 비로소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낸다. 그러려면 약간의 자제심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의 내적 논리와 인과율을 지키고, 플레이어의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펼쳐 나가도록 도와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관심을 갖고 전망을 해도 좋지만, 무엇이 일어날지를 결정할 순간이 되면 자기의 희망과 기대는 치워 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마스터링의 대가는 그 선을 지켰을 때 주어진다. 자기가 정말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던 것, 정말로 대답을 보고 싶은 의문에, 플레이를 통해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대답을 해주는 것이다. 이에는 다른 방식에서 얻을 수 없는 만족감이 따른다.


[아포칼립스 월드], "강령" (p. 109): 진한 글씨는 제가 임의로 강조한 부분입니다.


이런 마스터링 방식은 마스터가 준비해온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기존 방식과는 뚜렷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플레이어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지 지켜보고, 그에 따라 상황이 어떻게 변해갈지 같이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2. AWE 룰의 작동방식: 새로운 요소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먼저 AWE 룰 특유의 2d6 판정을 살펴보겠습니다. AWE 판정 룰 특성상 10+로 단순히 성공하는 경우는 적습니다. 플레이 중에 끊임없이 7-9의 부분성공이나 6- 실패가 나오고, 이때마다 플레이에 새로운 변수가 일어납니다. 7-9에선 원하던 것을 일부만 얻거나 다른 대가를 치르거나 혹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합니다. 6- 실패에서도 마스터 액션으로 상황에 또 다른 변수가 생깁니다. 이렇게 플레이 중에 새로운 요소가 줄곧 덧붙여지고 상황이 예측할 수 없게 변하는 것이 AWE의 특징입니다. 


반면 기존 RPG의 판정룰은 훨씬 더 마스터의 뜻대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행동이 성공하면 마스터가 허용하는 선에서 이득을 주면 됩니다. 아예 곤란한 행동은 사전에 막거나 큰 페널티를 먹이면 됩니다. 판정이 실패한 경우도 굳이 새로운 변수를 더할 의무가 없습니다. 필요하면 다른 식으로 시도하게 하거나 재도전 기회를 주면 됩니다. 필요하다면 시나리오 작성 단계에서부터 성공, 실패 여부를 따라 분기를 나눠 준비하는 것도 쉽습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AWE에선 마스터의 예상이나 계획을 따라 전개를 유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플레이 중에 새로운 변수를 끊임없이 만들어 넣게 되고, 예측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룰북에서도 '철저한 준비는 오히려 해롭다'고 강조합니다.  


AWE의 기본 액션 중에도 플레이 속에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상황 읽기]나 [뇌 개방](혹은 [지식 더듬기]) 같은 게 있지요. 플레이 중에 생기는 변수를 예측하고 통제하기보다, 오히려 그런 변수를 끌어안고 즐기는 것이 AWE의 플레이 방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AWE 플레이의 나침반: 장르 규칙(캐릭터 액션)과 국면 설정. 


이야기가 예측불허로 끝없이 좌충우돌한다면, 어떻게 그 흐름을 조율할 지가 문제겠지요. AWE는 장르 규칙(특히 캐릭터 액션)과 국면 설정을 통해, 플레이의 지향점과 얼개를 잡도록 되어 있습니다.


AWE의 캐릭터 액션은 각 캐릭터의 개성을 잡아줄 뿐만 아니라, 플레이의 방향성을 잡는 데도 큰 역할을 합니다. 캐릭터 액션은 배경세계가 어떤 곳이고 어떤 인물이 나오고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그에 따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담고 있습니다. AWE의 캐릭터 유형은 해당 장르와 배경을 철저히 분석하고 담아낸 시스템의 정수입니다. 이 바탕 위에서 참가자들이 배경세계의 살을 덧붙여가고 플레이 속에서 흥미진진한 사건을 만들어가는 것이죠. 


국면 설정은 플레이의 방향과 얼개를 잡는 또 하나의 도구입니다. 앞서 얘기한 대로 AWE에선 마스터가 이야기 전개를 미리 예측해서 준비하는 방식이 불가능합니다. 대신 PC를 둘러싼 세상과 상황을 느슨하게 잡아두고, 거기서 나올 수 있는 소재나 NPC를 준비해두는 것이죠. 천변만화 하는 플레이 속에서도 마스터가 중심 소재나 테마(주제 질문 등)를 잡고 살리는 방편입니다.


한편 [밤의 마녀들]이나 [스프롤] 같은 AWE 시스템에선 캐릭터 유형과 활동을 보다 엄밀하게 좁혀두고, 사건의 진행 구조를 보다 정형화된 방식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것 역시 장르/배경 분석을 시스템에 담아낸 방식 중 하나이지요. 생소한 소재를 다루거나 단편 플레이로 AWE 플레이를 할 때, 보다 수월해진다는 장점도 있을 테고요.




* 맺음말


AWE 시스템의 디자인 철학은 "플레이를 해서 어떻게 되는지 알아낸다"는 강령으로 함축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스터가 줄거리를 미리 준비해오지 않고, 철저히 플레이 중에 일어나는 사건과 변화를 즐기는 것이지요. AWE 시스템들은 장르 규칙을 토대로 이를 소화할 수 있도록 고안된 룰을 갖추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고마워요 대소동 해결단], [월드 인 페릴], [스프롤], [몬스터하츠] 같은 AWE 시스템이 다양하게 나올테니, 선택의 폭은 더 넓어지겠지요.


AWE의 이런 플레이 방식은 고전적인 다른 시스템과는 분명히 다르고 이게 잘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스터 역시 플레이에서 어떤 전개가 일어날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하는 재미는 독특한 체험이란 점을 덧붙이고 싶네요. 아무쪼록 즐거운 플레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