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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강좌/칼럼

RPG 플레이에서 개인의 욕망과 그 구현.

by 애스디


TRPG라는 취미의 강점은, 개개인의 욕망과 취향을 반영하고 맞춤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런 점이 없다면, 영화/게임/만화 같은 매체가 훨씬 더 화려하고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완성도도 높겠지요. 결국 RPG가 RPG만의 고유한 즐거움을 최대로 살리자면, 참가자 개개인의 취향에 맞춰진 플레이를 함께 만들고 즐겨야 할 터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팀원의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플레이에 살려내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RPG 플레이에서 겪는 온갖 애증과 문제는 결국 각자가 이 플레이에서 바라던 무언가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TRPG에서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이 모여 각자의 바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RPG는 하나의 플레이 - 가상의 세계 속의 인물과 이야기 - 를 공유하는 것이고, 이 "하나의 플레이"로 모두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니까요. 




1. 고전적 해법: 마스터 중심 진행


이에 대한 고전적인 해법은, "마스터가 플레이를 주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스터가 자신을 포함한 각 플레이어의 취향과 바람을 조율하고 모아서 플레이를 준비하고 진행해가는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요. 실제적으론, 각 마스터가 자기가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걸 준비하고 각자의 취향을 "할 수 있는 선"에서 맞춰가는 식이 될 때가 많고요. 지난 [ORPG 팀의 기획과 운영]이나 [단편 시나리오를 어떻게 준비할까?]는 이런 마스터 중심의 진행방식에 기초한 부분이 많습니다.


마스터 중심 진행은, 예전 RPG 시스템들의 기본 가정이기도 했고 나름대로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다만, 1) 마스터에게 부담이 크게 쏠린다 는 단점이 있고요. 이 때문에 RPG 플레이가 2) 마스터 취향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애초에 이 방식은 플레이 내용이 마스터 자신이 즐기고 익숙한 쪽이 아니면 무리지요. 허나 그를 넘어 마스터 1인이 플레이 전반을 독재하며 자기 취향을 강요하는 데까지 이르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이 시스템에서 이상적인 마스터의 역할은, 참가자 모두의 욕망을 한데 담는 '성배'가 되어 플레이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러려면 마스터가 플레이어 개개인의 바람을 파악하고 이를 실제로 플레이에 반영해야 하죠. 이런 노력에서 겪는 주된 장벽이 소통의 문제입니다.




2. 소통과 양보의 문제


고전적인 마스터 중심의 플레이든, 팀원이 서술권을 나눠갖고 함께 참여하는 플레이든, 참가자 개개인에 맞춰진 플레이를 하려면, 각자의 욕망과 기대를 공유해야 합니다. 일단 서로가 뭘 원하는지 알아야지요. 그리고 이게 제일 어려운 부분이라고 봐요.


플레이에 대한 각자의 욕구와 기대를 나누고 채우기 힘든 이유로...


-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를 플레이에서 어떻게 달성할지 모른다. 

- 각자가 원하는 것을 모임 속에서 나눌 기회나 방편이 모자란다.

- 서로 원하는 것이 상충해서 이를 동시에 채우기가 곤란하다.

+ 자기 욕망에만 관심이 있고 다른 팀원의 욕망을 채우는데 무관심하다.


등이 있습니다. 


앞의 세 가지는 기술적인 문제에 가깝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나누고 구현할 방법을 찾으면 나아질 수 있지요. 허나 마지막 "자기 욕망만 신경쓰는 경우"는 답이 없습니다. 이건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만큼 희생하지 않으면 플레이가 굴러갈 수 없는 구조에요. 참가자 모두의 욕망을 소통하고 이를 같이 추구하는 게 비효율적이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면, 마스터 중심의 고전적 방식을 고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스터가 플레이를 만들고 모든 갈등을 조율하며 끌어가는 것입니다.




3. 능동적인 참여에 따르는 책임


참가자가 자신의 욕망을 좀더 적극적으로 채우려면, 플레이에 그만큼 더 많이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던전월드]나 [페이트 코어], [피아스코] 같은 최근 룰의 경향이기도 하고 '합의에 의한 플레이'와도 맞닿는 이야기지요.


그러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플레이어가 기존의 마스터가 가졌던 권한(서술권)을 일부 나눠갖고 플레이에 참여한다는 것은, 전에 마스터가 졌던 책임도 같이 진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즐거운 플레이를 만든다"는 책임 말입니다. 자신의 욕구 만큼 다른 사람의 욕구도 존중하고 이해하며 이를 채우려 해야지요. 


플레이 속에서 이를 소통하고 실제로 구현하는 방법과 노하우도 익혀가야 하고요. 그냥 "서로 잘 얘기해서 소통하면 됩니다~" 하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 부분에선 먼저 각 RPG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이를 함께 플레이를 만들어가는 도구로 "활용"하는 법을 익혀가야 합니다. 시스템에 따라 애초부터 고전적인 마스터 중심 진행에 맞춰진 경우도 있고요. 그렇지 않은 경우도 각각마다 고유의 방향성과 양식을 갖고 있으니까요 ([TRPG를 하려면 꼭 룰북을 써야 하나요?]에서 이러한 룰의 역할을 다룬 바 있습니다). 그 외로 배경세계와 장르에 대한 지식과 기대를 공유하고 이 안에서 인물과 이야기를 다루는 법 역시 중요하고요. 일반적인 얘기는 [마스터처럼 플레이하기]에서도 다뤘으니 참고해보세요.





* 맺음말


처음엔 가볍게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압박스런 글이 됐네요 (링크도 주렁주렁 ㅎㅎ;;). RPG 플레이가 이렇게 어려운 거냐, 뭐 이렇게 신경쓸 게 많냐...고 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시작하실 땐, 이렇게까지 부담가질 건 없다고 봐요. 다만 RPG를 꾸준히 계속하고 더 즐겁게 즐기고 싶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한 취미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과 노력을 들여 우리가 RPG를 하는 것은, RPG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가자 개개인에 맞춤한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RPG만의 가능성이라고 보고요. 모쪼록 각자가 팀에서 플레이에 가진 기대와 바람을 나누고 성취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RPG 플레이의 욕구/유형에 어떤 것이 있나 같은 얘기도 도움이 될테고요 (참고: [로빈 로스- 참가자 유형과 그 활용], [RPG 플레이의 세 가지 경향] 등). 무엇보다 함께 하는 팀원을 존중하는 자세가 제일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