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 강좌/칼럼

자작 룰은 왜 환영받지 못하는가?

by 애스디


자기만의 RPG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하는 분들이 꽤 많지만, 자작 룰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는 드뭅니다. (제작 중인) 자작 룰이 등장할 때 관련된 논쟁과 비판이 제법 있었지요. 여기서는 왜 자작 룰이 실패하기 쉬운지 살펴보고, 바람직한 자작 룰(인디 룰)이 지향할 방향을 짚어볼까 합니다.




1. RPG 시스템의 구성요소.


먼저 일반적인 RPG 시스템이 완성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꼽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판정 관련 룰

  2) 캐릭터 제작 룰

  3) 장르/배경 설정

  4) 플레이에 필요한 데이터


통상적으로 룰이라고 하면 1) 혹은 2) 정도까지만 생각하기 쉽지만, 상용 룰북의 구성을 보면 그 이상으로 3) 장르/배경 설정이나 4) 플레이에 쓰일 데이터가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제대로 플레이에 쓸 시스템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룰의 골격만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배경 설정과 데이터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자작 RPG 시스템 제작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1)이나 2)가 아니라 3)과 4)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방대한 배경지식과 이를 데이터로 전환하는 수고가 따르지 않으면 나올 수 없거든요. 가장 역사가 오랜 RPG인 D&D 시리즈의 강점도, 그동안 축적된 배경 설정과 그를 뒷받침하는 풍부한 데이터에 있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자작 룰이 비판받는 첫번째 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 1) 판정 규칙과 2) 캐릭터 제작에 관련된 내역만 건드릴 뿐, 실제 플레이에서 필요한 세계에 대한 설정과 데이터는 빠뜨리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건 실제 플레이를 위한 규칙으론 반쪽 이하인 셈이죠. 즉, 실용성이 없습니다.




2. 자작 룰이 범용 시스템이면 안되는 이유.


또한 제가 본 많은 자작 룰이 범용 RPG의 형태를 띄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위에서 지적한 3)과 4)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실제 플레이를 위한 세부 설정과 데이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범용 룰의 모양새를 띄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작 룰이 이렇게 "범용 룰"로서 의미를 가질 순 없는 것일까요?


1) 모든 RPG는 이미 그 자체가 플레이를 위한 "툴(tool)"이다.


RPG 시스템은 무엇이든 그 자체로 완성된 게임이 아닙니다. 범용 RPG든 특화된 장르 RPG든 관계 없이, 팀마다 고유의 플레이를 만들기 위한 "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룰을 쓰든지 "플레이" 그 자체를 준비하고 진행하는데 고유한 창작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독자적인 룰을 만들고 따로 설정과 데이터를 쌓는 일이 필요할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새로 룰을 만드는 수고를 하는 것보다, 자기가 하려는 플레이에 맞는 기존 시스템을 찾아 활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이쪽은 실제 플레이를 준비하는 데만 역량을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2) 이미 범용 시스템은 많이 나와 있다.


만일 자기가 하려는 플레이에 딱 맞는 규칙이 없다고 해도, 꼭 룰을 새로 만들어야 할까요? 배경에 상관없이 다양한 장르를 지원하는 범용 RPG는 이제 국내에도 많이 출간되어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 GURPS만 있는 세상도 아닙니다. [페이트 코어]가 있고, [새비지 월드]도 있습니다. 각각 고유한 특성도 뚜렷해서, 어떤 플레이를 지향하든 이 세 가지 범용 RPG로 커버하지 못할 것은 거의 없습니다. 상세하고 철저한 고증/구현을 원한다면 GURPS를 하면 됩니다. 전투와 액션 위주의 화끈한 플레이를 원한다면 새비지 월드를 쓰면 됩니다. 형식에 덜 구애받는 이야기 위주의 플레이를 하고 싶다면 페이트 시스템을 쓰면 됩니다. 게다가 이 시스템들을 위한 서플리먼트와 추가 자료들도 많습니다. [페이트 코어] 같으면 [페이트 시스템 툴킷]으로 온갖 개조가 가능하고요. GURPS나 새비지월드도 마찬가지로 서플리먼트 활용에 따라 무궁무진한 응용이 가능합니다.


3) 색다른 판정 규칙은 그 자체론 별 의미가 없다.


이렇게 되면, 자작 룰이 내세울 점은 고유의 아이디어를 이용한 판정 룰(혹은 기타 시스템 규칙) 뿐일 것입니다. 설정이나 데이터의 방대함에선 상용 룰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참신한 아이디어를 적용해 독자적인 판정 규칙을 만들었다고 해도, 대개 그 자체 만으론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참신한 판정 룰 자체는 굳이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플레이에서 더 시급한 것은, 판정의 참신함보다 플레이 자체를 위한 배경설정과 데이터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돌이켜보세요. 룰은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정작 플레이는 하지 않고 있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3. 자작 룰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자작 룰을 만드는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일까요? 그냥 기존의 상용 룰을 쓰는 것이 늘 최선일까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작 룰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방향들이 있습니다. 바로 다른 기존 룰이 다루지 못하는 "틈새 시장"을 노리는 것입니다. 사실 돌아보면 외국에선 90년대 이래 끊임없이 다양한 인디 RPG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국내에 발간된 [던전월드]나 [페이트 코어]도 이런 인디 RPG 붐에서 태어난 시스템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성공적인 창작 RPG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자기만의 차별성, 특수성을 가진다.


성공적인 인디 RPG들은 다른 시스템이 흉내낼 수 없는 고유의 차별성을 갖고 있습니다. 대개 훌륭한 인디 RPG는 하나의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연마해 탄생합니다. 예를 들어 [폴라리스]는 의식 언어라는 방식을 통해 마스터 없이 마음과 후회의 갈등 구도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지요. [피아스코] 같은 경우, 캐릭터를 개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관계'를 통해 설정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고요. [페이트 코어]의 면모는 프리폼으로 캐릭터 개성을 정의하고 활용하는 독특한 시도입니다. 이렇듯 인디 RPG를 만든다면, 하나의 혁신적인 차별성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2) 마이너한 장르/배경를 다룬다.


기본적으로 자작 룰이 범용룰이 되어선 비교우위가 없다는 점은 위에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룰이 다루지 못하는 장르에 특화된 룰이 되는 쪽이 낫겠지요. 예를 들면, [GUMSHOE]의 경우 추리물에 특화된 룰로서, 판정 없이 자원(기능 점수)을 소모하는 것으로 단서를 얻게 되어 있지요. 이러한 혁신은 추리물 장르에 특화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비슷하게 모험기획국의 [시노비가미], [헌터즈문], [인세인] 같은 규칙도 각각 하위 장르에 걸맞는 규칙을 발달시킨 결과물입니다. 우리나라의 사례로 추리물 RPG [대저택]이나 조선시대 양반들의 정치물 RPG [적전赤戰] 등도 있습니다. 굳이 새 룰을 만들지 않더라도, 무협 캠페인 같이 독자적인 장르, 배경의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고요 (예: [GURPS 무협] #1, #2, #3, #4).


3) 기존의 룰을 개조한다. 


처음부터 완전히 무에서 출발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점진적인 개조가 더 나은 결과를 낳는 일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던전월드]는 [아포칼립스 월드] 시스템으로 D&D를 오마쥬한 것이지만, 더욱 큰 호응을 낳았죠. [페이트 코어]도 사실 본바탕은 [FUDGE]라는 공개룰에 면모라는 요소를 붙인 데서 출발한 거고요. [페이트 코어]나 아포칼립스 월드 엔진에 기반한 창작룰도 무수합니다. 완전한 창작룰보단 이러한 개조룰이 더욱 쉽고 유용한 대안입니다 (예: JULIET님의 던전월드 개수룰 [판타지 스타], [오리엔탈 스피릿], [공각기동대]. 구르는 사람들의 [고마워요! 대소동 해결단!]).




4. 결론


창작 룰이 나온다는 것은 좋은 시도입니다. 그러나 이젠 국내 RPG계 실정도 많이 바뀌어서, 더 이상 "쓸만한 규칙이 없어서" 자작 룰을 만들 때는 아닙니다. 작년부터 쓸 수 있는 룰들이 급속히 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지요. 이제는 단순히 자기만의 룰을 만든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게 아니라, 다른 시스템으로 할 수 없는 플레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인디 RPG를 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온갖 힘을 쏟아 자작 룰을 만들어도 플레이에 쓰이지 않는다면, 마치 실제론 쓰지 않는 캐릭터만 만드는 거나 다름 없지요.


그리고 창작 룰 만큼이나, 플레이를 위한 자료를 축적하는 일도 많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시나리오든 캠페인/배경 설정이든 하우스룰이나 팬메이드 데이터든 간에요. 이쪽도 충분히 값지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제1회 TRPG 시나리오 컨테스트]는 그런 면에서 뜻 깊은 일이었고요. _(__)_ TRPG 저변 확대를 위해선 도리어 이런 단편 시나리오/캠페인 자료들이 절실하지 않나 싶습니다. 최근 누메네라 팀이 많이 생긴 것도 공식 시나리오 자료들 덕택이 아닌가 싶고요.


여기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한국 RPG계에 보석 같은 작품과 자료들이 더욱 많이 탄생하길 고대합니다. :)



- 참고: 관심 있으신 분은, 창작 RPG [이어리니안의 유산] 제작자 김메피님이 올린 [자작룰을 올리는 분들을 위한 두 가지 이야기]도 살펴보시면 유익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