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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강좌/칼럼

영화 "아바타"로 본 TRPG 개론.

영화 [아바타]가 나온 당시 썼던 글인데, 다시 발굴해서 올립니다^^;




TRPG가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은 늘 쉽잖은 질문이었어요. 그런데 문득 RPG 플레이를 영화 [아바타]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다른 세계의 또다른 존재가 되어본다는 점에서요. 



잘 아시다시피, [아바타]에서 주인공은 클론된 나비 족의 육체를 얻게 되지요. 그리고 경이로 가득찬 판도라 행성을 탐험하고 다른 존재들을 만나게 되죠. 이처럼 RPG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인물이 되어보는 체험을 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나비 족이 되어서도 처음에는 여전히 원래처럼 "해병"처럼 행동했다는 점이에요. 자신만만해서 뭐든지 자기 힘과 무기로 해결하려 들고, 낯선 환경과 동물들에 대적하려 들었죠. 하지만 그러다가 나비 족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점차 '해병 제이크'만이 아니라, '나비 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자라가게 됩니다. 나비 족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죠.


RPG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상 세계 속의 새로운 인물이 되지요. 하지만 단순히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RPG가 다른 게임과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TRPG 플레이어는 캐릭터에 몰입하면서, 그 캐릭터로서 캐릭터답게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단순한 게임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로서 그 자체의 의지와 정체성이 살아난다는 점이 RPG 캐릭터의 특징이 아닐까 싶어요.


"내 생각에, 게임말과 RPG 캐릭터의 차이는 이 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게임을 지켜보다가 어떻게 해보라고 훈수 뒀는데, 당신이 "아냐. 내 캐릭터는 그렇게 안할 거야." 라고 답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거나 그럴 수 있다면, RPG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간단한 구별이 RPG와 다른 게임 간에 놓인 차이점이다."


In my opinion, the difference between a token and a role-played character is this: Hypothetically, a person watching the game looks over your shoulder and suggests a move, and your reply is "No, my character wouldn't do that." If this happens, or is capable of happening, then at some level you are playing a role-playing game. This simple distinction puts a world of difference between RPGs and other games. 


- John H. Kim, "What is Role-Playing Game" 중 발췌



한편, [아바타]에서 주인공 제이크가 나비 족에 동화되면서도 동시에 인간으로서 관점을 지녀서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다 폭넓게 파악하고 대응한다는 점도 독특하지요. 예를 들어서 인간 정복자들의 의도, 계획이나 전력 같은 것 말이죠. 완전한 나비 족이 되면서도 다른 나비 족과 '다른 관점'을 동시에 갖고 있달까요.


RPG에서도 마찬가지로 캐릭터로서의 관점만이 아니라, 가상세계 밖 참가자로서의 관점이 동시에 있습니다. 이런 캐릭터 밖 관점은, 전술적/지능적 판단일 수도 있겠고, 서사적/극적으로 플레이를 어떻게 끌어갈까 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이런 캐릭터 안과 밖의 다층적인 관점에서 오는 긴장과 풍부함이 RPG 플레이 만의 독특함이라고 생각합니다.


4시점론에서는 이것을, 인물/배우/작가/관객의 4가지 시점으로 나눠 이야기하지만, 사실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캐릭터로서 관점과 캐릭터 밖 플레이어로서 관점 사이의 충돌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캐릭터 관점에만 너무 치중하면 다른 참가자들과 유기적인 협동이나 거시적인 조망을 잃은 채, 자기 인물에만 빠져서 시야가 좁아지기 쉽고요. 반대로 캐릭터 밖 시점만 살아나면, 캐릭터가 인물로서 생명력을 잃고 그저 플레이어의 전술에 따라 움직이는 게임말에 불과하게 되겠죠. 이 두 가지 시점의 비중은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둘 모두가 공존하고 조화해야 좋은 RPG 플레이가 될 것 같습니다.



다음에 RPG가 무엇이냐고 주변 사람이 물으면, 다른 세계 속의 "아바타"가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