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 강좌/칼럼

"플레이어 간의 경쟁"에 관해서.

by 애스디


TRPG는 본질적으로 참가자의 경쟁보다 협동에 기반한 놀이입니다. 허나, 실제에서는 플레이에서의 영향력과 비중을 놓고 경쟁하는 일이 벌어질 때도 종종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TRPG 플레이에서 "플레이어 간의 경쟁"이 두드러지는 경우를 살펴보려 합니다. 




1. PvE 플레이에서 플레이어 간의 경쟁.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PC들끼리 서로 대립하는 PvP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PC들이 한 일행으로 함께 싸우는 "PvE 플레이에서의 경쟁" 문제입니다. PC들(혹은 플레이어들)끼리 대립하는 게 뚜렷한 경우는, 오히려 갈등을 명시적으로 다루기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시노비가미]나 [파라노이아], [폴라리스]처럼 애초에 시스템이 경쟁/대립 구도를 활용하게 된 경우도 있고요. 또는 서사적으로 PC들끼리 대립하는 경우도, 플레이어들 간에는 서로 합을 맞춰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D&D 등 던전판타지 장르를 위시한 모험물에서는, PC들이 함께 협력해 싸우고 행동하지만 플레이어들끼리는 은연 중에 서로 경쟁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PC들은 분명히 각 역할을 분담하며 함께 싸우지만, 왠지 모르게 누가 더 효율적인 캐릭터를 만들고 더 많은 피해를 입히며 활약하는지 경쟁한다는 말이지요. 이런 구도에선 PC의 공동승리를 위해 강한 캐릭터를 만들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게 옳다고 보고, "플레이어 간의 경쟁"이 촉진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간 문제됐던 "플레이어 vs. 마스터" 간의 군비경쟁만이 아니라 "플레이어 vs. 플레이어" 간의 군비경쟁도 있는 셈이죠.




2. 플레이어간 경쟁의 양상.


이런 "플레이어간 경쟁"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대략 다음의 3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듯 합니다.


1) 파워 빌딩: 더 강하고 만능인 캐릭터를 만들려는 경쟁.

2) 전투 등 장면에서 혼자 더 활약하기: ex) 대미지 딜링 경쟁, 극단적인 스킬 수치로 활약하기.

3) 캐릭터 스포트라이트 및 비중 경쟁


보다시피 1)~3)이 순차적으로 서로 연결되는 면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론, 다른 PC야 어찌됐건 자기 캐릭터가 최대한 많은 장면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활약하고 돋보이고 싶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특히 이를 이루기 위해서, 룰의 세부를 파악하고 최대한 이용해 자기 캐릭터의 힘을 극대화 하려는 경우가 많지 싶습니다 (속칭 "룰치킨"이지요). 룰에 바탕해서 이를 정당화 하고요.


팀이나 시스템에 따라선, 이런 "플레이어간의 군비경쟁"도 플레이의 일부라고 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룰을 더 그만큼 파고 머리를 썼으니 그만큼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니냐 라는 시각이지요. 남들보다 더 강하고 만능인 캐릭터를 만들어 활약하고 싶은 욕망은, RPG 초창기부터 쭉 있었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이기적인 동물인가 봅니다). 




3. 플레이어간 경쟁의 문제점.


"플레이어 간의 경쟁"은, 그 결과로 누군가가 소외감/박탈감을 느끼게 된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모든 팀원이 이런 최적화 경쟁을 즐긴다면 그것대로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플레이 비중을 독차지하며 다른 참가자는 그만큼 소외될 위험이 늘 있습니다. 


D&D 4판 등의 경우, 탱커/딜러/힐러/컨트롤러 등의 역할 구분을 더욱 뚜렷이 해서, PC들이 철저히 서로 다른 역할로 협동하도록 안배했지만... 여기서도 탱킹이나 힐링 만으로는 충분히 만족을 못 느끼는 면이 있던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 딜러 역할이 인기기도 하고, 탱커나 힐러 능력도 "공격"을 같이 하면서 탱킹/힐링을 하도록 짜여 있지요. 그리고 탱커도 은연 중에 딜러랑 자기를 비교하기도 합니다. 딜러끼리의 경쟁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사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PC들이 서로 협력해 적을 쓰러뜨린다"라는 던전판타지의 구도를 보자면, 내가 활약하는 것만큼이나 동료가 활약하는 것도 즐거워야 할텐데 이게 꼭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던전월드]를 하면서도 전투에서의 활약-누가 더 결정적인 대미지를 주느냐-을 놓고 경쟁하고, 자기 캐릭터가 약하다고 불만을 갖기도 하니까요. 그런 맥락에서 "마스터가 플레이어의 팬이 된다" 만큼이나, "플레이어가 다른 PC의 팬이 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 해법과 결론.


"플레이어 간의 경쟁"의 해악을 알고 이를 피하려면, 그 해법은 간단합니다. 자기만 활약하려 하지 말고, 다른 플레이어도 다같이 재미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를 뒤집어 보면, 다른 참가자들이 내 캐릭터를 신경 써주며 배려해준다면, 굳이 내가 캐릭터 지분을 확보하려고 아둥바둥 애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됩니다.


좀더 소극적 지침으론 "룰치킨 캐릭터를 만들어 우위를 가지려 하지 말자"를 들 수 있습니다. [누메네라]의 기능이나 [13시대]의 출신배경 룰에서 플레이어의 설정 폭을 자유롭게 열어둔 것은, 참가자들이 룰을 남용하지 않으리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룰의 빈틈으로 보고 더욱 만능인 캐릭터를 만들어 혼자 활약하려 한다면, 시스템의 디자인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죠. 


결론적으론, 위에도 얘기했듯이 서로가 다른 PC의 팬이 되면 좋겠습니다. 자기 캐릭터, 자기 활약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캐릭터가 멋지게 부각되는 걸 같이 즐기고 서로 빛나도록 신경쓰는 플레이가 이상적이지 않나 싶네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