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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강좌/칼럼

RPG 시스템의 성향: 컨텐츠 소비형 vs. 창조형.

최근 몇 년 간 국내에 다양한 RPG 룰들이 출간되며 RPG 룰의 스펙트럼도 전에 없이 다양해졌습니다. TRPG라고 한데 묶어 부르지만 각각의 RPG 룰마다 고유의 플레이 방식이 있어 차이가 많고요.


여기서는 RPG 룰의 특성을 나누는데 있어, 플레이 내용을 채우는데 주로 어디에 의존하느냐(컨텐츠 소비형 vs. 창조형)를 살펴보려 합니다.



1. 컨텐츠 소비형 RPG: D&D, Call of Cthulhu, 로그 호라이즌 등.


고전적인 RPG 시스템은 대체로 플레이 속 상황(특히 전투)을 세세하고 체계적으로 다루는 룰과 거기 맞춰진 컨텐츠를 방대하게 갖추고 있습니다. D&D나 Call of Cthulhu, 로그 호라이즌 RPG 같은 예시가 여기에 속하겠죠. 


RPG는 본질적으로 창작활동이고 이런 시스템에서도 룰과 데이터를 활용해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건 마스터의 몫입니다. 다만 어떤 괴물과 난관이 나오고 룰 상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의 디테일이 RPG 제작사가 만든 룰북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컨텐츠 소비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컨텐츠와 데이터를 활용,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플레이를 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스터의 부담이 적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방대한 공식 배경세계(오피셜 월드)나 상용 캠페인/시나리오집을 제공하는 경우도 많고요. 플레이 방식과 컨텐츠가 정형화되어 있다보니 이런 점이 수월합니다. 


이런 고전적인 컨텐츠 소비형 RPG에선 대개 마스터(혹은 시나리오)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더불어 공식 데이터와 룰 적용이 중시되는 일이 많고요. 방대한 데이터와 룰을 제공하는 대신, 거기서 벗어나 아예 새로운 컨텐츠나 변형을 도입하는데 제약이 생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PC나 괴물, 보물 데이터를 커스터마이징하는 옵션룰이 덧붙기도 하지만, 이것도 룰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니까요. 즉, '쓰여진 룰'대로 컨텐츠를 활용하는 것이 주된 플레이 방식입니다.



2. 컨텐츠 창조형 RPG: 던전월드, 페이트 코어, 피아스코 등.


한편 요즘 나오는 RPG 시스템들 중엔 보다 유연한 룰을 갖고 참가자들의 창의력을 살려 플레이 속 장면을 채우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던전월드처럼 플레이의 기본 배경이나 방향성은 갖추되 세부설정이 열려있는 것들도 있고, 아예 페이트 코어 같이 배경세계부터 완전히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RPG 룰은 참가자들 전원이 플레이 속 세계를 직접 만들어내고 채워넣는 걸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룰북에서 제공하는 컨텐츠보다 플레이 중에 참가자들이 직접 만들어넣고 덧붙이는 디테일이 훨씬 중요한 거지요. 예를 들어, 던전월드의 PC 액션이나 괴물 데이터는 애초부터 룰북의 문구가 다양한 해석와 적용이 나오도록 쓰여져 있습니다. 참가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직접 흥미진진한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이것은 페이트의 [면모]나 피아스코의 [무대세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런 유형의 RPG는 단순히 룰북의 컨텐츠를 소비하는 식으론 제대로 즐길 수가 없습니다. 참가자 모두가 룰을 도구로 삼아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장면을 꾸미고 스스로 컨텐츠를 만들어가야 하지요. 새로운 괴물, 마법물품, 커스텀 액션, 특기, 특수항목 등을 직접 만들어 추가하고 변형하는 것도 적극 권장하고요. 


경량 룰 기반의 컨텐츠 창조형 RPG를 즐기는 방식은, 고전적인 컨텐츠 소비형 시스템과는 크게 다릅니다. 이런 시스템의 재미는 플레이 속에서 팀원들의 역량을 모아 얼마나 재미있는 장면을 만들어내냐에 달려있으니까요. 그만큼 팀 전체의 역량이 중요합니다. 



3. 복합형 RPG?


이런 전형적인 분류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사례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GURPS의 경우, 아주 디테일한 룰과 데이터를 갖고 있지만, 실제 플레이에 쓰일 컨텐츠는 대부분 팀마다 만들게 됩니다. 캠페인의 방향성에 따라 옵션룰의 적용여부를 조정할 수도 있고요. 새비지월드의 경우도 룰은 한결 가볍지만 그 적용이 엄밀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보고요. 디테일하고 엄밀한 룰 체계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컨텐츠 소비형 RPG와 흡사하지만, 세부 컨텐츠와 데이터에 있어선 RPG 제작사의 공식 자료에 덜 의존한다는 점이 차이입니다. 


한편 13시대처럼 캐릭터와 배경세계의 설정/활용에선 폭 넓은 가능성을 열어두되, 전투 부분은 고전적인 방식대로 비교적 엄밀한 시스템과 데이터로 다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본적인 방식은 D&D처럼 룰북의 괴물, 보물 데이터 등을 활용해 모험을 채우지만, 마스터와 팀원들의 창의력이 개입할 여지도 많지요. 괴물, 물품 데이터를 새로 만들거나 변형하는 데도 부담이 훨씬 덜하고요.




맺음말


대략적인 분류라 이것만으로 개별 시스템의 특성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겠죠. 그래도 RPG 제작사의 공식 데이터, 컨텐츠에 얼마나 의존하느냐를 바탕으로 플레이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방식을 크게 나눠볼 수 있으리라 봅니다. 어느 쪽이든 각자 팀에서 쓰는 RPG 시스템의 지향점과 특성을 잘 알고 활용하시면 좋겠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