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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입문

TRPG란 어떤 것인가요?

by 애스디


그간 주변 사람들에게 "네가 하는 TRPG라는 취미가 정확히 어떤 거야?"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사실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거라, 대충 설명하고 얼버무린 적도 많은 거 같은데요. 이번에 TRPG가 어떤 것인지 나름대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1. TRPG는 무엇인가요?


TRPG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각자가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되어 또다른 삶을 체험하는 놀이입니다. 이걸 어떻게 하냐고요? TRPG는 대개 3~6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고, 그 중 한 사람이 '마스터', 나머지는 '플레이어'가 됩니다. 플레이어들은 각자 이야기 속의 인물들(주인공)을 하나씩 맡고요. 마스터는 나머지 세계 전체와 조역들을 맡습니다. TRPG 플레이는 플레이어들이 각자 자기 인물(Player Character, PC)이 어떻게 행동할지 선언하고, 이에 따라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마스터가 응답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습니다.


장면: 출근길 지하철 안.

등장인물(PC): 수혁(휴가나온 말년 병장), 영주(미모의 양호교사)


<마스터> 지금은 출근길 지하철 안..

<마스터> 이른 시각이지만, 사람들이 제법 많은 편이네요.

<수혁> 전투복 차림으로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서는... 폰에 연결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풍선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다가

<수혁> 저 앞에 스타일 좋은 아가씨를 발견하고 휘익 휘파람을 붑니다(...)

<마스터> 예. 스타일 좋은 양호선생님은 뭘 하고 계신가요?

<남영주> 흠, 간편한 캐주얼 정장을 입고 있고요

<남영주> 한손에는 핸드백, 다른 손에는 강아지가 있는 휴대용 우리를 들고 있다가

<남영주> 뭐, 적당히 그렇게 들고서 지하철 타고 가겠네요.

<수혁> 무관심하게 뉴스를 흘깃 보다가... 다시 그 아가씨 쪽으로 다가가 창문에 비친 모습을 힐끔힐끔 곁눈질

영화로 비유하자면, 플레이어들은 주연배우가 되고 마스터는 감독이자 조역/엑스트라가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각자 가상세계 속의 다른 인물이 되어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진행해가며 체험하는 놀이가 RPG 입니다.




2. RPG는 룰을 활용합니다.


한편 이렇게 말로만 진행하다보면, 각 인물들의 행동 결과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할 때가 있죠. 영주가 수혁이 힐끔거리며 엿보는 걸 알아챌 수 있을지 없을지 같은 상황이요. 어떤 결과가 나와야 할지 뻔할 때는, 팀 전체가 혹은 마스터가 임의로 정하지만, 불확실 할 때는 결과를 정하기 위해 일정한 '룰'을 사용합니다.


<남영주> 수혁이 흘끔흘끔 보는거 알아챌 수 있을까요? (...)

<마스터> 예. ㅎㅎ

<마스터> 수혁이 [관찰]로 판정하세요.

<수혁> 3 d 6을 굴립니다 : (4+1+5) = 10

<수혁> 관찰 판정에 1차이로 성공

<마스터> (일반인이니까, 수혁이 [관찰]에 성공하면 몰래 엿보는 건 성공했을 듯)

<남영주> 예. 눈치 못챕니다 ㅋㅋ

<마스터> 수혁은 너댓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창문에 비친 영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수혁> '헤에... 저 아가씨 스타일 죽이는데... 나보다 한 둘 정도 나이 많아 보이긴 한데 미인이 괜찮아... 아아, 행복하다... 사회란 좋은 거구나...' 같은 생각을 하며

<수혁> 기쁨의 눈물을 삼킵니다, 뭔가 껄덕댈 건덕지가 없나 기회를 노리는 중


여기서 수혁이 몰래 영주를 '관찰'하는 것을, 영주가 알아챌 수 있는지 없는지 GURPS 라는 룰을 이용해 판정했습니다. GURPS에서는 6면체 주사위 3개 (3d6)를 굴려 그 합이 인물의 실력과 같거나 더 낮게 나오면 행동이 성공합니다. 수혁은 몰래 상황을 염탐하는 [관찰] 기능을 실력 11로 갖고 있고, 주사위 셋을 굴려 4, 1, 5로 합이 10이 나와서 [관찰] 행동은 성공. 영주 몰래 살펴보는데 성공했습니다.


RPG 룰이 캐릭터를 어떻게 나타내는지 좀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이수혁의 캐릭터 시트(인물의 상세정보 모음)를 봅시다.


이름: 이수혁

특성치: ST(근력) 13 / DX(민첩성) 10 / IQ(지능) 10 / HT(건강) 12

장점: 건강, 고통에 강함, 대담성 4단계, 밤눈 4단계, 카리스마 1단계

단점: 게으름, 불운, 자만심, 호색

기능: 관찰 11, 군인 12, 리더십 11, 예의범절(군대) 10, 유도 14, 은밀행동 12, 전술 10, 조달 12, 총기(라이플) 11.


특성치는 인물의 기본적인 근력, 민첩성, 지능, 건강 같은 능력을 나타내고요. 기능은 여기에 학습/경험이 더해진 실력입니다. 장점과 단점은 그외의 다양한 면모를 표현하고요. 예를 들어 수혁이 미모의 영주에게 저렇게 관심을 보인 건, [호색] 단점 때문이기도 하죠.


RPG에서는 이렇게 일정한 룰을 이용해,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자기가 구상한 인물을 어떻게 나타낼지 뒷받침하는 룰이 있고, 그 룰에 따라서 플레이 중에 캐릭터가 어떤 일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정해지죠. 컴퓨터 게임 RPG (CRPG)에서 캐릭터를 다양한 능력치로 표현하고, 여러 캐릭터가 일행을 이뤄 활동하는 것이, 바로 이 TRPG (Table-top RPG)에서 따온 것입니다.


한편, 룰이 있다고 해도 꼭 일일히 모든 상황에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 장면에서, 수혁이 엿보는 것을 영주가 알아챘나 못챘나는 사소한 거니까, 굳이 판정하지 않고 "못 알아챘다" (혹은 "못 알아챘다")고 정해도 되겠죠. 이렇게 RPG의 룰은 반드시 적용하는 규칙이 아니라, 플레이 진행을 돕는 도구라는 점에서 다른 게임 규칙과는 다릅니다. 




3. TRPG는 왜 하나요?


TRPG는 다른 소설/만화/영화/게임과 달리 TRPG 만의 특별한 재미가 있습니다. 


서두에도 이야기했듯이, TRPG는 "새로운 삶의 체험"입니다. 자신이 구상한 자기만의 인물로 이야기에 참가하고 그 주인공 시점에서 세상을 체험하기 때문에, 그만큼 인물에 깊이 몰입하며 이야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스토리 매체와 달리 주인공의 행동을 매 순간마다 자신이 직접 정하니까요. 비쥬얼 노벨이나 게임북처럼 주어진 커맨드/선택지에 갇히지 않고 행동의 자유도 있고요. 그래서 저는 TRPG를 "가장 직접체험에 가까운 간접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TRPG를 통해 환타지 세계의 풋내기 모험가, 강호초출의 무림인, 첩보기관의 특수요원, 인간 틈에 몰래 사는 요괴나 초능력자 등 온갖 세계의 온갖 인물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1인칭 시점으로요.


또한 TRPG는 여럿이 모여서 함께 하는 놀이라, 서로가 가진 아이디어와 창의력이 합쳐져 이야기를 펼친다는 점도 TRPG만의 강점입니다. MMORPG나 다른 게임의 팀플레이는 그저 같이 적들을 때려잡고 보물과 경험치를 모으는 것 뿐이지만, TRPG에선 같이 이야기의 향방을 이끌어나가니까요. 기발한 행동과 아이디어가 상황을 뒤집고 예상치 못한 전개로 뻗어나가기도 합니다. 이런 즉흥성과 역동성 역시 TRPG만이 가진 매력입니다.




4. TRPG는 어떻게들 하나요?


이제 TRPG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대강 감이 잡혔을 거에요. 일반적인 TRPG 플레이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조금 더 부연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RPG 팀은 보통 3-6명 정도의 인원으로 이뤄지고요. 한 명은 마스터, 나머지 2~5명은 플레이어가 됩니다. 보통 플레이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배경에서 어떤 인물로 어떤 내용을 다룰지 대강 이야기하지요. 가장 많이 하는 장르는 D&D (Dungeons & Dragons)로 대표되는 환타지 배경의 영웅 모험담입니다. 그외로도 현대 배경의 공포물, 초인물, SF 등 장르별로 특화되어 있는 시스템이 많습니다. 한편, 온갖 배경의 다양한 인물을 다룰 수 있는 범용 시스템도 있고요 (페이트 코어, 새비지월드, GURPS 등). 전반적으로 보면 현실에서 맛볼 수 없는 색다른 배경, 극적인 모험담을 많이 플레이하는 것 같아요. RPG 시스템도 그런 활극 쪽이 많고요.


어떤 내용을 할지, 각자 어떤 인물을 할 지 대강 정해지면, RPG 룰(시스템)을 이용해 캐릭터를 만듭니다. 룰을 통해 캐릭터를 시트(캐릭터 특성의 목록)로 정리하고 배경이나 설명을 덧붙이지요.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준비하는 한편, 마스터는 대략적인 플레이 내용과 도입부, 가능한 전개를 정리해둡니다 (보통 '시나리오'라고 합니다). 플레이 중에 등장할 조역(NPC, Non-Player Character)이나 적들, 주인공들이 극복할 장애를 룰에 바탕해서 준비하지요. 


마스터가 대략의 전개를 시나리오로 준비하고, 플레이어가 주인공을 맡아 이를 진행해가는 것이 전통적인 형태입니다. 그래서 "마스터는 신이다"는 말도 있었죠. 플레이어는 각각 한 명의 인물만을 맡은 반면, 마스터는 나머지 배경 전체와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을 주관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스터가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스터가 많은 권한을 갖고 있지만 이는 플레이의 편의를 위한 것이고, 결국 "재미있는 플레이"를 만들어가기 위한 직책이지요. 최근의 RPG 시스템 중에는 마스터의 권한을 참가자 전원이 보다 고르게 나눠갖는 경우도 많습니다.


보통은 팀원이 한 자리에 모여 플레이하지만 (TRPG 혹은 TR), 인터넷에서 채팅방에 모여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Online-RPG, ORPG 혹은 OR). 한 번 플레이에 드는 시간은 대체로 3-5시간 정도고요. 이런 한 차례 모임을 세션(session)이라고 합니다. TRPG에선 보통 시나리오 하나를 한 세션 내에 마치지만, 시나리오 분량이 많거나 진행이 느리면 여러 세션에 나눠서 진행하기도 합니다. 한 시나리오가 끝나도 TV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처럼 이어지는 에피소드/시나리오를 진행하는 경우도 많고요. 이렇게 이어지는 장편 플레이는 캠페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만하면 대략적인 소개는 마친 것 같습니다. RPG 플레이의 실제에 보다 관심있으시면, 김성일님의 [TRPG를 해봅시다]를 참고해보세요. 주로 쓰이는 RPG 룰에 대해 궁금하시면, 제가 쓴 [TRPG 첫걸음 가이드 #2: 룰 고르기]를 참고해보세요. TRPG 커뮤니티 Session, 네이버 카페 TRPG Club D&D, 엔하위키의 TRPG 항목도 참고하시면 좋습니다.